1993년 1월 10일, 나는 안기부 정보학교에 입소했다.[1] 한 겨울이었다. 내가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고, 정식으로 정보기관원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입사하기 전에도 인성검사다 뭐다 하며 몇 차례 드나 들긴 했지만, 막상 정식 요원이 되어 들어가니 기분이 달랐다. 청사 내에 줄지어 서 있던, 곧게 뻗은 소나무가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보였다. 텅 빈 운동장에 누렇게 변색된 잔디가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당시엔 안기부 청사가 두 군데로 나뉘어져 있었다. 해외와 대북 정보를 담당하던 부서들은 이문동 청사 내에 있었다. 물론, 우리가 입소한 정보학교도 이문동에 있었다.[2] 이에 비해 국내 정보 부서와 대공수사, 외사보안 부서들은 남산 청사에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편하게 이문동, 남산이라고 불렀다. 이문동 청사는 천장산 북쪽 사면의 나지막한 구릉을 끼고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곳은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의 2대 부장이었던 김형욱 씨가 헬기를 타고 직접 물색했다고 한다.
이문동 청사의 운동장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천연잔디 구장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운동장은 예전에 중정의 축구팀이었던 양지축구단의 연습장으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양지축구단은 “1968년 로마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진출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김형욱 부장이 창설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정보기관이 그런 일까지 신경썼는가 싶었다.
청사 내를 가로지르는 나지막한 언덕에는 조선조 경종과 그의 부인의 묘인 의릉이 아래 위로 자리잡고 있었다. 왕능은 대개 풍수지리상으로 좋은 땅에 위치해 있다. 당연히 경치 또한 좋다. 봉분 아래에는 양지못이라고 불리는 인공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능 아래 못을 팠다고 해서 이씨 종친회의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양지못에는 서슬 퍼른 시절에 생겨난 코미디 같은 전설이 있었는데, 중정 시절에는 “양지못의 금붕어를 관리하는 붕어아비도 고향에 내려가면 군수가 직접 영접을 나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내가 입소한 정보학교 교육과정은 정규과정 30기였다. 정규과정이란 매년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1년간의 신입부원 교육과정을 말한다. 이는 국정원의 기간요원을 양성하는 과정이다. 정규과정 출신들은 매년 엄격한 서류심사와 공개시험을 통해 선발된 자원들이다. 이들은 1년간의 고된 합숙 훈련을 통해 자연스럽게 강한 동질감과 연대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은연 중에 국정원의 주인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강한 책임감을 갖게 된다. 매년 정규적으로 배출되다 보니 선후배 정서도 강한 편이다.[3]
정보학교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맞아준 사람은 훈육관이었다. 훈육관은 우리의 일년간의 교육을 전담할 사람이다. 우리 훈육관은 송경О이란 분으로, 그는 정규과정 20기 선배였다. 그는 또한 학사장교 출신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 우리 일행을 맞은 자리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너희들은 03 정부의 정규 30기다”라고 일장 연설을 했다. 우리 기수의 입사를 김영삼 정권의 출범과 연관 지어 의미를 부여하려는 듯 했다.
훈육관은 교육생들과 긴밀히 교감할 수 있어야 하고, 정보기관 이란 곳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입사 10년 차의 직원 중에서 선발되었다.[4] 훈육관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매년 선발할 때가 되면 어느 정도 경쟁 분위기가 형성된다. 대개는 해당 년도 동기회가 선거를 통해 품성이 괜찮은 동기를 그 해의 훈육관으로 추천한다. 훈육관은 보통 한 명이지만, 요즘처럼 입사 인원이 늘어나면 두 명이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 때에는 여자 동기들을 담당하는 여 훈육관이 한 명 있었다.
훈육관은 어렵고 힘든 자리다. 교육기간 동안에는 교육생들과 같이 지내야 하기 때문에 처음 몇 달간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백 여명의 인원들을 지휘 통솔하는 일이 간단치 않은 데다, 조그만 문제가 생겨도 직접 일일이 나서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무척 고달프기까지 하다. 당연히 해당 기수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당장 훈육관의 훈육 책임부터 따진다. 나처럼 좀 큰 사고(?)를 치면 더 더욱 훈육책임을 묻게 된다.
우리 훈육관은 첫인상이 별로였다. 생김새며 목소리가 영 호감이 가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첫인상과는 달리, 그가 다정 다감하고 세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나는 교육기간 중이나 국정원 생활 중에 훈육관으로부터 과분한 애정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에 건너오고 나서도 아직까지 훈육관에게 변변히 전화조차 못했다.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이 지면을 통해서나마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우리 동기는 남자가 100명, 여자가 20명이었다. 우리는 모두 40명씩 세 개 반으로 나뉘어졌다. 나는 A반 17번이었다. 전반기 교육의 모든 과정은 반 단위로 이루어졌다. 운동경기도 반 단위로 시합이 벌어졌다. 우리는 정식 신분증 대신 노란 색의 임시 명찰을 지급받았다. 청사 내에서는 항상 명찰을 양복 상의에 부착하고 다녔다. 노란색은 병아리를 연상시키는 색깔이기 때문에 아마도 교육생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노란 명찰은 병아리 기관원의 임시 신분증이었던 셈이다.
동기들 간에 나이 편차가 있었다. 나이 많은 동기와 가장 어린 동기가 7-8년간의 차이가 났다. 대학을 마치고 곧바로 입사한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사회에서 몇 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들어온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기들 가운데서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다. 재수와 휴학으로 인해 입사가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은 나보다 나이가 어린 동기들이었지만, 그 중에는 내가 형이라고 불러야 하는 동기도 더러 있었다.
나이 차이가 있다 보니 언어 문제가 불편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언어문제 때문에 서로 토론도 하고 해결책을 모색했지만 결론이 잘 내려지지 않았다. 입사동기라면 서로 친구처럼 지내야 하는데,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성인이 된 후 입사한 탓에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대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내 경우에도 동기 중에 고등학교 3년 후배가 있었다. 그래서, 같은 동기지만 나이 차이가 좀 나면 서로 존댓말을 쓰곤 했다.
입사 첫날, 우리는 양지관이라는 기숙사에 입소했다. 방은 2인 1실로 배정받았다. 양지관은 사각형 모양의 다층 건물이었는데, 건물 중간에 조그만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양지관뿐만 아니라 이문동 청사 내 거의 모든 건물은 대개 그런 구조로 되어 있었다. 미관상으로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중간이 뚫린 사각형 구조가 폭격 맞을 경우 건물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구조라고 했다.
양지관은 우리 기수가 최초로 입주한 신축건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건물의 유지 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매일 청소 때면 바닥을 닦고 쓸었다. 난간에는 손때가 묻지 않도록 기름칠도 했다. 양지관은 겉은 번지르르 했으나, 사실은 부실투성이 건축물이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외벽이 떨어져 나가고 칠이 벗겨져 금새 흉물로 변했다. 당시에 엄삼О 기조실장이 건축과정에서 “많이 해먹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1998년 3월, 국가안전기획부는 국가정보원으로 개명하였다. 정보학교는 그 후 정보대학원으로 승격하였다.
이문동 청사는 행정구역상 동대문구 석관동에 속했으나 통상 이문동이라고 불렀다. 지난 95년 청사 이전 후, 정보학교도 경기도 성남으로 이전했다.
이에 비해, 정규과정이 아닌 일반 공개채용 직원들은 비정규 또는 기본과정이라고 부른다. 요즘은 정규과정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있다고 한다.
지난 노무현 정권 때부터 이런 전통이 깨졌다고 한다. 요즘은 12-3년차 선배 기수에서 훈육관이 선발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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