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7년, 면 단위 중학교에 진학했다. 한 학년에 네 개 반이 있었다. 나로서는 갑자기 훨씬 큰 물로 나간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나는 수업 이외에 따로 공부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대신 책은 조금 읽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교실 내에 학급문고라는 것이 들어온 후 투명인간, 해저이만리, 삼총사 같은 책들을 재미 있게 읽었다. 고전읽기라는 게 생긴 후에는, 신유복전이니 박씨전이니 하는 책을 읽고 읍내에 시험 치러 가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좀 더 많은 책을 읽었다. 어느 일본 사람이 쓴 다섯 권짜리 삼국지는 여러 번이나 읽었다. 걸리버여행기, 로빈슨크루소우 등도 읽었다. 세계위인전이란 두꺼운 책도 읽었는데, 그 책 속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막사이사이, 케말퍄샤, 앵그루마 같은,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이런 책들은 모두 큰 형이 사다 놓은 것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는 대지(The Good Earth)라는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 어린 내 마음에도 그 소설 속의 이야기와 우리 집이 비슷한 데가 많다고 느꼈다. 특히, 소설 속의 여주인공인 오란과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위해 묵묵히 희생하는 모습이 똑같았다. 차이점이라면, 대지의 주인공 왕룽은 어찌하다 운 좋게 큰 부자가 되었지만, 우리 아버지에게는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소설 속에 혁명가로 나서는 셋째 아들을 - 지금은 그의 이름도 기억할 수 없지만 - 한동안 나의 이상형이라고 믿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나도 공부라는 걸 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되었다. 선생님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강권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 나름대로 ‘나도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가장 골짜기 동네인 남산 구비기라는 동네에 사는 친구가, “우리 마을에 서울 법대에 다니는 사람이 있다”며 자랑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산골짝에서도 서울 법대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나라고 못 갈 이유가 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친구가 말한 서울 법대생은 장기표 씨였다. 그 분은 당시 시국사건으로 제적되어 쫓기고 있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내 자신이 작은 독재자가 되는 체험을 했다. 그 때도 나는 학생회장이 되어 있었다. 나는, ‘나 혼자 공부 잘 하는 것보다 친구들을 열심히 공부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에 사로 잡혀 있었다. 학교에서는 아예 내 공부는 팽개치고 다른 아이들을 감독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쉬는 시간이나 자습시간에 공부하지 않고 방해하는 친구들을 혹독하게 매로 다스렸다. 여자 아이들도 엄하게 다루었다. 나는 그때 그렇게 하는 게 잘하는 짓이라고 착각했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중학교 때 내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집에서는 혼자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글자 그대로 “코피 터지게” 공부했다. 시골 중학교에서는 유례 없는 높은 성적을 받았다. 동네 사람들이,“천재가 났다”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그들은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아마 모르고 한 소리였을 것이다.
중학교를 마칠 즈음,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시국이 어수선해졌다. 김재규 중정 부장이 자신의 은사이자 상관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다. 시골 아이들에게는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 해 겨울은 어느 때보다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김재규 부장이 사고(?)를 치고 나서, “형님, 한다면 합니다!”고 외쳤다고 했는데, 왠일인지 나에게는 그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나는 1980년, 읍내에 있는 밀양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형님들은 모두 마산고로 유학을 갔었는데, 내가 고등학교 진학하던 시절에는 이미 뺑뺑이 (무시험) 지역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밀양에 남게 된 것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은 그런대로 잘 본 것 같았다. 중학교 1, 2학년 때 배운 내용에서 몇 개 틀리고, 중학교 3학년 때 배운 내용은 거의 다 맞았던 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 진학해서도 그야말로 죽으라고 열심히 공부했다. 1학년 때는 집에서 10 Km 정도 되는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했다. 1학년 2학기 때 드디어 전교 1등을 차지했다. 거의 전 과목에서 수를 받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학년이 끝나갈 즈음에, “너 같은 아이가 잘 돼야 한다”며 격려해 주셨다.
그런데, 나에게 고등학교 공부는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의 기초학력이 터무니 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쉽게 극복이 되지 않았다. 특히, 수학과 영어가 문제였다. 다른 친구들은 고등학교 입학전 학원에서 이미 『성문기본영어』를 땠니, 『성문정통영어』를 배웠니 했는데, 나는 도통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몰랐다. 과외라는 것은 더 더욱 몰랐다. 설령 알았더라도 과외를 받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남들이 다 다닌 유치원이란 곳이 있는 줄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니 나의 사정이 한심할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시골에서 별다른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다. 오로지 학교에서 지정해 준 독서실에서 죽으라고 공부해야만 했다. 국어와 국사 등 인문사회 과목은 재미도 있었고, 내가 가장 잘했다. 모의고사를 치면 거의 항상 국어 성적이 수학성적 보다 더 낫게 나왔다. 학력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무엇보다 수학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야 했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됐다.
입시 공부만 하다 보니 고등학교 때는 별다른 추억거리가 없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독서는 꾸준히 했다. 집에 형님이 사 놓은 책들이 있었다. 동서문화사라는 곳에서 출간한 전집을 두루 보았다. 한 때 도스도옙스키에 매료되어 『죄와 벌』과 『까라마조프 형제들』 등을 읽었다.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내용을 완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세밀한 심리묘사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교 2학년 말에는 입시위주의 공부에 회의가 들어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럭저럭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982년 치른 학력고사에서는 썩 만족스런 점수를 받지 못했다. 수학 25개 문항 중에서 여덟 문제를 찍었는데, 불행히도 모두 빗나갔다. 여덟 문제 중에서 두 문제만 맞았어도 결과가 달라졌을 터인데, 운이 없었다. 수학 한 과목에서 잃은 점수가, 전체 과목에서 잃은 점수를 합한 것과 비슷할 정도였다. 서울대 사회학과에 원서를 냈다가 간발의 차로 떨어졌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형이 보던 고시잡지에서 고승덕이라는 사람이 쓴, 『4년간의 휴가』라는 장문의 합격기를 감명 깊게 읽었다. 소위 고시 3과를 최연소, 차석,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의 수기였다. 나는 그의 합격기를 가방에 넣어 다니며 공부하기 힘들 때마다 꺼내서 읽곤 했다. 그 글 덕분에 힘든 수험생활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 때는 그가 나의 영웅이었다.
그후 고승덕 씨는 박태준 회장의 사위가 되었는데, 김대중 정권 초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일약 유명해졌다. 그 후에는 증권전문가로 변신하여 TV에도 자주 얼굴을 내는 모양이었다. 나는 국내 부서에 근무하는 친구에게서 고승덕 씨에 대해 들었는데, 조금은 실망스런 내용이었다.
그는 지난번 총선에서는 서울 저초에선가 당선 되었다는 뉴스를 본 것 같다. 지난 2008년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내부의 문제를 고발 했으을 때 그의 이름이 또 다시 회자된 적이 있었다. "김용철 변호사와 고승승 변호사, 미래에섹 박현주 회장 등 광주일고 삼인방이 몰려 다니며며...화려한 밤문화를..."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아마도 김 변호사의 폭로로 인해 구지에 몰린 삼성이 퍼뜨린 악의적인 선전이었을 것이다.
그 즈음 『마당』이란 잡지의 오효진 기자라는 분이 쓴, “고등학교는 시험선수 양성소인가?”라는 글도 인상 깊게 읽었다. 이 분은 그 후 충청도 어느 지역에서 군수가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마 내 기억에 그 잡지는 젊은 시절의 조갑제 씨가 편집했던 것 같다. 그 잡지는 지질도 좋았지만, 내용은 더 좋았다. 편집도 잘 되었고 사진도 좋았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 넌더리를 내던 때였기에, 그 글이 더욱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시험선수”라는 말이 한동안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성격이 좀 재미 없는 사람이라 별명이란 게 없다. 아주 어릴 때에는 “역도산”이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역도산은 일본에서 활동했던 전설적인 프로 레슬러이다. 김일의 스승이었다는 설도 있었다. 나는 우리 형제들 가운데서 키가 제일 컸다. 터울이 많이 진 탓에 어머니의 영양상태가 회복된 덕분이었던지, 아니면 원기소를 많이 먹었던 탓인지, 어쨌거나 발육상태가 괜찮은 편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 머슴이던 우(상) 아저씨가 나에게 역도산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듣기 싫지 않은 별명이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소크라테스”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학교 독서실에서 친구들과 얘기 중에 소크라테스 얘기가 나왔는데, 친구들은 “악법도 법이다”며 사약을 들이킨 소크라테스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자기의 소신에 따라 죽는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며 소크라테스를 변호했다. 그 때부터 친구들은 나를 소크라테스라고 불렀다. 나는 요즘 가끔 인터넷에 글을 쓸 때면 소크라테스라는 필명을 쓸 때가 있다. 김남천이라는 가명을 쓸 때도 있다. 물론 남천강에서 따 온 이름이었다.
참고로, 필자는 김용철 변호사의 용기를 높이 평가한다. 그가 삼성의 내부비리를 폭로하는 과정에서 겪었을 인간적인 고뇌, 고통에 대해 동병상련의 느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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