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느 시골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문명의 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았다. 아마도 나는 문명 이전의 마지막 세대에 속할 것 같다. 우리 마을엔 전기도 전화도 수도도 없었다. 나는 예습이란 말도 복습이란 말도 몰랐다. 학교 갔다 와서는 진흙탕 속이나 모래사장에서 뒹굴면서 자랐다. 바쁜 농사철이면 농사일도 도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 먹이고, 꼴 베고, 소죽 끓이는 일”은 내 차지였다.
당시 시골의 주요한 교통수단은 소달구지였다. 좀 지나 경운기라는 물건이 들어오면서 달구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밤, 아버지가 “대동 경운기”를 몰고 오던 장면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이웃 동네는 국도변에 위치해 있어 전기도 일찍 들어 왔지만, 우리 동네는 그렇지 못했다. 찻길에서 한 참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동차를 보기가 어려웠다. 재수가 좋은 날이어야 겨우 한 대 볼 수 있을까 말까 했다.
어쩌다 멀리서 먼지 풀풀 날리며 제무시(GMC) 트럭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우리들은, “차차차, 차~온다”며,“3-3-7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하곤 했다. 그리고는, 트럭에 한참 매달려 갔다가 차 뒤 번호판 위에 달린 꼬마전구를 전리품으로 “수확”해서 돌아오곤 했다. 어릴 때 나에겐 기차가 오히려 친숙했다. 멀리 강 건너 마을에 경부선이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길다란 화물 열차가 지나갈 때면, 재미로 차량 숫자를 세어보곤 했다. 한밤 중에는 “철거덕 철거덕”하는 기차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1]
얘기하는 김에 나의 어릴 적 생활에 대해 좀 더 소개해 보겠다. 나는 여느 시골 아이들처럼 들에서 스스로 놀거리를 찾았다. 이른 봄철이면 온 들을 뛰어 다니며 노고지리를 잡으러 다녔다. 노고지리 사냥은 노하우가 좀 필요한 작업이다. 우선, 노고지리 둥지를 찾아야 하는데, 무작정 들을 헤맨다고 둥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하늘에 떠 있는 노고지리가 착지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노고지리라는 녀석은 영리한 동물이라, 하늘에서 곧바로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녀석들은 자기 집 근처에 착지하고 난 후, 나름대로 사주경계를 펼친 다음에 안전한 걸 확인한 후, 걸어서 제집으로 찾아 들어간다. 노고지리가 앉고 나서 조금 지난 후에, 갑자기 달려들어야 한다. 놀란 노고지리 녀석이 자기 집에서 “퍼드득”하고 날아 오르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노고지리가 날아 오른 주위를 뒤지면 보리밭 사이에 다소곳이 자리잡은 둥지를 찾을 수 있다. 일단 둥지만 찾으면 잡는 건 시간 문제다. 한 군데 출입구만 남겨두고 둥지를 봉쇄한 후, 출입구에다 덫을 놓고 잠복근무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장마철이 지나고 큰물이 진 다음에는 강가에서 빠꾸미를 잡아 싸움을 붙이고, 여름철이면 강둑에서 쇠똥구리를 잡아 싸움을 붙이며 놀았다. 빠꾸미는 모래밭 속 한 뼘쯤 깊이의 구멍 속에 사는 애벌레다. 구멍에 밀집 대를 꽂은 후 모래를 파내고 나면 잡을 수 있다. 잡은 빠꾸미 두 마리를 고무신 뒤축에 넣어 두면 지들끼리 죽을 때까지 싸움을 한다. 빠꾸미는 대가리 색깔이 금색을 띄는 금빠꾸미와, 은색을 띄는 은빠꾸미가 있는데, 대체로 금 빠구미가 싸움을 잘한다.
쇠똥구리는 쇠똥 옆에 구멍을 뚫고 사는, 검은 색깔의 조금 큰 곤충이다. 이 놈을 잡으려면 우선 쇠똥을 치우고, 고무신이나 장화로 물을 떠와서 구멍 속으로 물을 부어 넣으면 된다. 한 10여 분쯤 지나면 녀석들이 질식해서 스스로 기어 나온다. 쇠똥구리 숫놈은 특히 이마에 멋진 뿔을 달고 있어서 보기가 좋다.
할일 없는 겨울철에는 구슬치기, 자치기, 딱지치기 등을 하며 놀았다. 특히, 망구라는 놀이를 많이 했다. 아마 표준말로는 술래잡기 정도가 될 것이다. 또한 겨울철이면 시골에서는 도박이 유행했는데, 그런 영향을 받아 나도 어릴 때부터 화투치기를 많이 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이미 민화투는 물론이고 뻥이나 육백 등 다양한 화투놀이를 두루 섭렵했다. 일찍부터 “짤짤이”와 “도리짓고땡”에 눈을 떠, 동네 형들과 어울려 놀곤 했다.
시골에는 마땅한 군것질 거리가 없었다. 나는 간식거리도 흙 속에서 자체 해결해야 했다. 기본적으로 들에서 자라는 것은 모두 먹거리였다. 봄철이면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둑에서 “피기”를 한웅큼씩 뽑아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초봄에는 참꽃을 꺾어 먹고, 늦봄에는 감꽃을 주워 먹었다. 감꽃은 아싹거리는 감촉과 달콤 쌉쌀한, 독특한 맛이 있었다. 감꽃을 지푸라기로 엮으면 예쁜 목걸이를 만들 수도 있었다. 목걸이를 만들어 벽에라도 걸어 두면 하이얀 꽃이 짙은 갈색, 즉 감색으로 변한다. 감이 어느 정도 자라 땡감이라도 되면, 소금물에 넣어 떫은 맛을 없애고 먹기도 했다.
여름철이면 참외 수박 등 서리할 품목들이 온 들에 널려 있었다. 별맛은 없지만 호밀이나 완두콩도 좋은 서리감이었다. 이웃 동네까지 원정을 가서 복숭아와 자두, 포도 등을 서리해 먹는 짜릿한 모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가끔은 재미로 고구마나 무우를 서리해 먹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가을에 하교 길에 이웃 동네의 무우 밭을 서리하다 들켜 줄행랑을 쳤는데, 일부가 가방을 뺏기는 바람에 다음날 학교에서 단체로 몽둥이 찜질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구른마 때기로 변상도 해야 했다.
먹을 게 없는 겨울철이면 “꼬꾸랑”이나 “올삐”를 캐먹었다. 꼬꾸랑은 논에서 자라는, 길다랗고 꼬불꼬불한 풀뿌리 같은 것이었는데, 너무 많이 먹으면 마후라(?)가 막힌다. 그 시절 시골에서는, 꼬꾸랑을 먹고 뒤가 막혀, 할머니가 젓가락으로 후벼내는 사태가 심심찮게 벌어지곤 했다. 올삐는 겉은 까맣게 윤이 나고 속은 하얀, 동그란 모양의 풀뿌리였다. 씹으면 아삭거리는 것이 제법 맛이 있었다. 겨울철에 캐먹는 “배뚱구리”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배뚱구리는 겨우살이라는 채소의 뿌리였는데, 배추뿌리보다 더 달고 풋풋한 맛이 났다. 이제는 기억 속에나 있는, 배고픈 시절의 아련한 추억들이다. 나는 요즘, “우리가 못 먹고 헐벗었던 시절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 게 아닌가?”하고 생각할 때가 많다.
당시엔 초등학교에서 무료 급식으로 빵을 나누어 주던 시절이었다. 반듯한 정 육면체 모양에 밑부분은 조금 단단하게 눋고, 새하얀 속살이 포슬포슬한, 무척 맛 있는 빵이었다. 이 빵을 얻어 먹으려고 일곱 살 때부터 학교에 들어가는 얘들이 적지 않았다. 입학할 때는 우리 학년이 70여 명이었는데, 2학년이 되고 보니 50여 명으로 줄어 들었다. 빵 얻어 먹으러 입학했던 얘들이 유급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학년은 6년 내내 한 반에서 배웠다. 내 아내는 6년간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내 짝이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머리가 조금씩 튀었다. 그 때부터 “착하고 공부 잘한다”는 칭찬을 듣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들려 주시던 “반쪽이” 이야기는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나의 최초의 문명사회 경험도 이때 이루어졌다. 선생님을 따라 십 리 길을 걸어 읍내 부근에 있던 공중목욕탕이라는 곳으로 단체관광(?)을 갔던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어린이회장이 되었다.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에 잠시 초등학교를 방문해 봤더니, 이제는 아이들이 줄어 폐교가 되어 있었다. 운동장에는 잡초가 수북이 덮였고, 그네와 미끄럼틀은 녹슬어가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마을에 전기라는 것이 들어 왔다. 아마 1975년 늦가을 어느 월요일 저녁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 마당에는 대한전선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다리가 네 개 달리고 가구같이 생긴, 커다란 흑백 텔레비전이 하나 설치되었다. 그 텔레비전은 브라운관 앞에 여닫이 문이 있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마을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 들었다.
전기가 들어오는 순간, 그 텔레비전에서는 군대 행진곡 같은 음악과 함께 『육탄의 용사들』이라는 자막이 흘러 나왔다. 당시 우리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전우』라는 드라마였다. 나시찬이라는 배우가 주인공이었다. 우리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전에는 김일의 박치기나 압둘라 부처의 16문킥이라도 볼려고 하면, 10원짜리 동전을 몇 개 들고 이웃 동네 만화방까지 원정을 가야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 졌기 때문이었다.
그 해 가을, 나는 『집념』이라는 드라마에 푹 빠졌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무생 씨의 데뷰작쯤 됐던 작품이었다. 이 드라마는 그 후 몇 차례 리메이커 되기도 했고, 세 권의 책으로 출판되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어릴 때 나는, “드라마 제목을 왜 집념이라고 했을까?”하고 궁금했다. 집념이란 말뜻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잡을 집(執)에, 생각 념(念)이라니? 생각을 어떻게 잡는다는 말이지?” 주위에 물어봐도 시원스레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 집념이란 말이 나에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후에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제초작업을 나가 보니, 우리 중대에서 내가 낫질을 제일 잘 했다. 그 때 나는, ‘내가 천상 촌놈인 게로구나’하고 생각했다.
꼬꾸랑이나 올비는 모두 그 지방의 사투리인데 정확한 표준말은 나도 알 수 없다.
밀양에는 허준이 약초를 캤다는 재약산과, 허준이 스승 유의태의 시신을 해부했다는 석골 동굴이 있다. 석골 동굴은 얼음골과 더불어 여름철에도 얼음이 언다고 하여 요즘도 가끔 뉴스에 나오곤 한다. 근처 석골사 주지가 유의태의 친구였다는 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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