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 부모님 이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셨고 위로 형이 두 명 있고 누나와 여동생이 각각 한 명씩 있었다. 우리 마을은 이름대로라면 크게 흥해야 마땅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명칭과 다르게 가난한 곳이었다. 당시 시골은 어디나 다 살기 어려웠지만, 우리 마을은 특히 오갈 데 없는 뜨내기들이 모여들던 곳이라서 더 가난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아주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농사를 가장 많이 짓는 편이었다. 머슴을 한 사람 둘 정도는 되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부지런히 농사 지어 저축하여 조금씩 땅을 늘린 덕분이었다. 덕택에 나는 어린 시절에 도시락을 못 사가 굶어 보았거나, 등록금을 못 내 야단맞은 적은 없었다. 물론 여유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3]
아버지는 농사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바깥으로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농사일은 주로 어머니 차지였다. 험한 농사일을 감당하느라 어머니의 고생이 심했다. 우리 어머니는 아마 이 세상의 어느 어머니보다 더 힘들게, 어렵게 사신 분일 것이다. 어머니는 고된 농사일에 단련된 탓인지, 한창 때는 어지간한 남정네들보다 근력이 더 좋았다.
어머니는 소박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고된 농사일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새벽기도를 나가셨다. 물론 할머니가 된 요즘에도 빠지지 않고 계속 나가고 계실 것이다.
지난번 내가 망명재판을 앞두고 있을 때, 어머님께서 나에게 국제전화를 하셨다. 그 때 어머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요즘 널 위해 매일 밤샘기도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짐작하기에 기도 제목은 뻔하다. “하나님, 아직도 갈 길을 몰라 헤매고 있는 우리 셋째를 속히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뭐 대충 그런 내용일 것이다.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교회에 나갔다. 어린 시절엔 나도 어머니를 따라 일요일마다 교회에 출석했다. 우리 시골 교회는 교인이 10여 명에 불과한 초미니 교회였다. 나는 교회에서 받은 상품으로 초등학교의 모든 학용품을 조달하다시피 했다. 나의 기본적인 도덕관념은 전부 어린 시절 교회에서 배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친구 영국이와 함께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학교까지 뛰어서 갔다. 도회지 아이들처럼 엄마 손에 이끌려 첫 등교하는 것은, 우리 같은 시골 애들에게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에 도착해 보니 운동장에는 이미 많은 어린애들이 모여 있었다. 예쁜 여선생님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 날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이를테면“정체성의 위기”라고 할만한 사건(?)을 겪었다. 나는 그 때까지 내 이름이 김기환인 줄 알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나를 김기삼이라고 불렀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호적이라는 곳에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교 들어가기 전에 나는 내가 여덟 살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나를 “만(滿)으로” 다섯 살이라고 했다.
나는 왜 갑자기 이름이 바뀌고 나이가 세 살이나 줄어들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호적이 뭔지도, “만으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선생님이 이름을 틀리게 부르고, 나이도 엉터리로 가르쳐 준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내 이름에 약간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기삼(基三)이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좀 촌스런 느낌이 있다. 나는 끝에 숫자가 들어가는 이름은 대체로 어감이 별로 좋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일, 삼, 오, 칠, 팔, 구, 어느 숫자도 이름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심지어 단위가 좀 더 큰, 천, 만, 억, 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숫자가 들어간 이름은 어딘지 성의(?) 없게 지어진 이름이라는 느낌이 있다.
아마 나의 아버님은 내가 태어난 후 즉시 호적에 올리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남자아이 가운데 셋째라는 생각에 그냥 별 뜻 없이 “기삼”이라고 등록했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집에서는 그냥 기환이라 불렀다. 아직도 나의 시골 친구들은 나를 그렇게 부른다.
이름만 틀린 게 아니라 생년월일도 잘못 등재 됐다. 나의 호적상 생년월일은 실제보다 1년 가량 늦다. 생일도 양력이 아니라 음력으로 기재되었다. 아마도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 시절의 시골에서는 “살아 남는 것 봐가며 적당한 때에 호적에 올린다”는 생각이 보편적이었던 모양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나의 출생에 관한 에피소드를 한 가지만 더 소개 해야겠다. 우리 집은 어머님이 무척 건강했기 때문에 모두 자로 잰 듯 두 살 터울이었다. 그런데, 유독 나와 바로 위의 형은 네 살이나 터울이 졌다. 어릴 때 나는 그 점이 항상 궁금하였다. “혹시 나와 형 사이에 한 명이 일찍 사고라도 당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
언젠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 어머니에게 그 점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있었다. “어무이(어머니), 와(왜) 히야(형)하고 내하고는 네 살이나 차이가 나능교(납니까)?”그러자,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내가 세치(셋) 나코(낳고) 더 안 나을라(낳으려) 켔는데(했는데), 할무이(할머니)가 하도 더 나라고(낳으라고) 케사서(해서) 니하고 니 동생하고 나온 기다”라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불현듯 할머니가 그리워졌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가족계획 캠페인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전후 베이비 붐이 일어 인구증가율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에 산아제한이 국가의 주요 사업이 되었다. 요즘처럼 우리나라 인구증가율이 세계 최저 수준이 되어 아이를 더 낳으라고 채근하는 사태가 벌어지리라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새로 들어선 군사 정권은 소위 『3-3-33』이라는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풀이하자면, “세 명의 자녀를 세 살 터울로 서른 세 살 이전에 낳자”라는 구호였다. 당시에는 이런 식의 표어가 유행했던 것 같다. 목표지상주의와 효율지상주의가 판을 쳤던 군사정권은 아무래도 숫자와 친했던가 보다. 이런 구호에는 “하면 된다”라는 돌격대 정신이 베어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표어 중에서는 『3-3-3』이란 것도 있었다. “하루에 세 번, 식사 후 삼 분 이내에, 삼 분간, 이를 닦자”라는 캠페인이었다. 요즘 기준으로는 좀 황당하고 우습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게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모두 박물관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구닥다리 옛날 얘기 같지만, 따져 보면 그리 먼 얘기도 아니다. 돌이켜 보면,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속에 보건소에서 줄지어 예방접종을 맞고, 학교에서 집단으로 채변검사를 하고 구충제를 나눠주던 시절이 있었다.
어쨌든, 우리 어머니도 혁명 정권의 시대정신(?)에 동참하여 세 명만 낳고 그만 낳으려 했는데, “구시대 정신에 살고 계셨던 할머니의 강권에 의해 나를 낳았다”는 말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우리 할머니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해 두는 게 좋겠다. 우리 할머니는 전형적인 갱상도(경상도) 시골 할매(할머니)였다. 할머니는 “학교 갔다 왔니?”를“핵교 갔다 왔노?”라고 하고, “나무에 올라가지 마라”를 “남괴 올라가지 마라”고 말했다. 내가 이발소에서 머리를 박박 밀지 않고, 스포츠 형으로 좀 길게 깎아서 돌아오기라도 하면, “와(왜) 온 돈 주고 반 머리 깎아 왔노(왔느냐)?”라고 핀잔을 주시던 분이었다.
할머니는 한글을 전혀 읽지 못했다. 아주 완전히 까막눈이었다. 글자는커녕 숫자도 읽을 줄 몰랐다. 심지어는 시계조차도 볼 줄 몰랐다. 할머니 방에는 작은 아버님이 생신 선물로 사주신 괘종시계가 하나 걸려 있었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 어머님께 심각하게 말씀하셨다. “야야, 아무래도 저 시계가 고장이 났는 갑다. 어제 밤에 저 시계가 한 번 땡 치고, 한 참 있다가 또 한 번 땡 치고, 세 번이나 그카더라...”
그 시계는 매 시각 중간마다 한 번씩 울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할머니는 우연히 12시 30분 이전부터 1시 30분 이후까지 깨어 계셨는가 보다. “할아버지를 먼저 보내시고 난 후, 할머니의 남은 시간이 얼마나 적적했으면 그런 불면의 밤을 보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지독히 아끼며 살다 가셨다. 평생 좋은 옷 한 벌 입어보지 못하고 남루하게 지냈다.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아끼는 게 유일한 생존 비결인 걸로 아신 분이었다. 볏알 하나, 밥풀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우리 집 마당은 할머니가 하도 많이 쓸어서 언제나 반질반질했다. 어쩌다 소죽물에 밥풀이 하나라도 발견되는 날이면, 마치 큰 소동이라도 난 것처럼 온통 경을 치셨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도시락에 밥알을 하나라도 남겨 가면 혼나기 때문에, 도랑에서 도시락을 씻어서 들어가곤 했다.
[1] 의열단은 밀양 경찰서 폭파사건, 종로 경찰서 폭파사건 등 1920년대의 주요 국내외 의거를 주도했다. 의열단 멤버들이 후에 광복군을 조직하는 모태가 되었다.
[2] 솔직히 말해, 필자는“햇볕”이란 용어에 조금 병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이 있어 그런지, 이런 식의 오역에 거부감이 있다.
[3] 월간조선 2003년 3월 호 “노벨상 국제로비 진상” 제하 기사에서는, 필자가 자장면 한 그릇 못 먹어 본 아주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조금 과장된 측면이 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 선생님을 따라 읍내 고전읽기 시험을 치러가서 자장면을 먹어 본 기억이 있다. 물론 그때 먹은 자장면 맛도 생생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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