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때로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건가 보다.

 

내가 이런 책의 서문을 쓰게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지구 반대편에서 말이다. 나는 늘상 글쓰기에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책을 쓸 정도로 부지런하지도 못했다. 책을 쓴다는 건 나의 상상력 밖의 일이었다.

 

고백하건데, 나는 자서전을 쓸 정도로 대단한 삶을 살지 못했고, 회고록을 남길 정도로 인생의 연륜도 없다. 그래서, 이 작은 기록이 실패한 전직 정보 요원의 한풀이나 넋두리 정도로 치부되지 않을까 걱정 되기도 한다.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국가정보원에서 근무하면서 알게 된 여러 가지 일들을 -내가 직접 경험한 일들뿐만 아니라 내가 어깨 너머로 보고 들은 일들까지 포함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흔히 정보 종사자들은 재임 중에 지득한 비밀을 무덤에까지 가지고 가는 것을 미덕으로 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가 알게 된 사실은 나 혼자 지고 가기엔 너무나 버거운 짐이었다.

 

나는 우리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에 눈이 멀어 민족을 배반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는 또한 우리 안보책임자가 북에 두고 온 가족에 발목 잡혀 국가를 반역하는 광경을 목도했다. 나의 양심상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내가 몰랐던 게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김대중과의 싸움이 이렇게 지리하게 오래 끌게 될 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우리 국민들이 나의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리가, 정의가 승리할 거라고 믿었다. 순진한 판단 착오였다.

 

나는 양치기 소년처럼 치부되었고, 나의 주장은 당나귀 이발사의 외침 정도로 취급되었다. 내 이마에는 배신자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고, 등 뒤에는 음해의 소리가 비수처럼 꽂혔다. 나는 오랫 동안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야 했다.

 

내가 겪은 우리 나라는 무관심과 이기심만 가득한 증오의 공간이었다. 내가 본 우리 사회는 찢어지고 갈라져서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분열의 땅이었다. 진실과 양심과 용기가 조롱 당하고 배척 받는 의미없는 곳이었다.   

 

나는 이제 이 외로운 싸움을 접고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지나간 일을 되돌아 보며 어디서부터 꼬였고 언제부터 접혔는지 되짚어 보려 한다. 아울러, 앞으로 무엇을 할,또는 할 수 있을 것인지도 생각해 보려 한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 부분은2003년 이후 내가 공개한 양심선언과 기자회견문을 모은 것이다. 양심선언은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과 대북송금, 임동원의 간첩혐의, 국정원의 불법도청, 김영삼 김대중 정권의 무기비리와 비자금 등에 관한 것이다.

 

뒷 부분은‘나’라는 인간에 대한 나의 설명이다. 이는 또한 전직 국정원 직원이 왜 양심선언을 하게 됐는지?”라는 물음에 대한 내 나름의 변명이기도 하다. 물론 국정원에서 내가 보고 겪은 경험이 주요 내용이 되었다. 

 

양심선언 이후, 나는 국정원의 치졸하고 어처구니 없는 흑색선전에 시달렸다. 정신병자라느니, 돈을 노린다느니, 정치권에 기웃거린다느니, 여자문제로 미국으로 도망 쳤다느니... 일일이 대꾸하고 해명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국민들에게 직접 설명하고 싶었다. “도대체 나란 인간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지?”를 변명하고 싶었다. 원고를 쓰고 나서 여기저기 출판사를 알아 보았지만, 선뜻 출판해 주겠다는 데가 없었다.

 

겨우 어느 신생 출판사를 찾아 맡겼는데, 누구에게 무슨 압력을 받았는지 마지막 순간에 “못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대한민국에서 관(官)이 이렇게 무서운 줄 미처 몰랐다.”는 말을 남기고서. 그리곤, 출판 생각을 접었다.

 

약 2년 여의 시간이 지나고, 2008년 4월 미 법정에서 망명 허락이 났다.

 

망명 재판 후 주요 일간지들이 나의 망명허락 소식을 기사화 해 주었다. 일부 주간지들도 심층 기사를 게재해 줬다. 그런데, 동교동 측은 여러 언론사 중에서 유독 힘 없는 일요서울만을 골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나는 내 문제로 인해 곤란에 처한 일요서울에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뭔가 도와줬으면 하는 생각으로 일요서울에 나의 원고를 연재하는 게 어떨지 문의했다. 의외로 선뜻 받아 들여졌다. 그 해 말까지 30회분을 연재했다.

 

그허나 그 해 년말, 일요서울은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연재를 중단했다. 그 와중에 일요서울의 편집국장이 옷을 벗었다. 그 후 일요서울과 동교동 간에 벌어졌던 명예훼손 건은 서로 합의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졌다. 지난 10년 간의 “반역의 세월”에 대해 이명박 정부가 뭔가 단호하고 엄정한 조치를 취해 주기를 기대했지만, 끝내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이 책을 쓰는 데 있어, 몇 가지 밝혀두고 싶은 점이 있다.

 

먼저, 이 책은 순전히 필자의 기억에 의존해 쓰여졌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나는 국정원을 나올 때 아무 자료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메모한 것도 없다. 기억 안 되는 일은 기억할만한 가치가 없는 일일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돌이켜 보니, 기억은 희미해지고 퇴색되어 있었다. 더 이상 기억해 낼 수 없는 것도 있었고, 아예 왜곡된 형태로 기억되어 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므로, 혹시 모를 “사실관계의 부정확”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둘째, 이 책에 등장하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사적인 감정이 없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나는 누구를 모욕하거나 폄하할 생각이 전혀 없다.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가능한 한 누구의 명예도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셋째, 이 책에 소개되는 나의 체험은 순전히 나 개인의 관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나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으로 인해 국정원 직원에 대해 편향된 인상이 심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넷째, 이 책을 쓰는 데 있어 보안문제를 고려했음을 말씀 드리고 싶다. 보안에 관한 내 나름의 기준은 국익이다. 아무리 중요하고, 아무리 얘기하고 싶은 내용이라도 공개돼서 김정일에게 이로운 내용이라면 공개하지 않았다.

 

다섯째, 이 글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전,현직 국정원 직원의 이름은 실명으로 실었다. 하지만, 명예훼손과 인원보안을 우려하여 최소한 한 자 이상을 가렸다. 이 점에 대해 독자와 당사자 여러분들의 특별한 양해를 구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출판하는 데 신세 진 분들을 기억하고 싶다. 한국에서 내가 속한 로펌으로 연수 온 전세준, 백종건 예비변호사는 친절하게도 교정을 봐 주었고, 젊은 세대의 시각으로 책의 내용에 대해 조언해 주었다.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출간을 흔쾌히 허락해주신 비봉출판사 박기봉 사장님께 감사드린다. 박 사장님께서는 이 책의 발간이 가져올 어려움을 기꺼이 감수하셨다. 그 분의 용기와 애국심에 특별히 경의를 표한다.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