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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5. 문민정권의 뒤안길 II

22. 문민정권과 언론

문민정권은 지나치게 여론에 신경을 썼다. 대통령 자신이 언론의 보도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짧은 신문과 생활과 대정실 보좌원으로 근무하면서 정권과 정보기관과 언론간의 관계에 대해 참 많이도 보고 들었다.

내가 대정실에 근무하던 94년도에도 이미 정권과 언론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당시 김영삼 정권도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진행했었다. 하지만, 문민정권은 언론 사정이라는 칼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기는 했지만, 실제로 직접 들이대지는 않았다.

한 번은 오 실장이 조선일보 김철 부장을 초청하여 대정실 직원들에게 언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강연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김철 부장은, “대한민국의 언론은 무조건 조져야 한다. 주먹으로 대하는 게 제일이다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자신이 언론인이면서 어떻게 저런 얘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민정권 시절 내내 조선일보의 힘이 막강했다. 요즘처럼 보수 일간지들을 죽이기 위해 사방에서 하이에나 떼처럼 합동작전을 벌이기 이전이었다. 조선일보가 찌라시 수준의 인터넷 언론들과 경쟁하며 허덕거리게 되리라고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조선일보 사주는 소위밤의 대통령이라고 불렸다. 실제 그는 그만큼 힘이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천칭의 한 쪽에 여타 신문을 쌓아 놓고는 다른 쪽에다 조선일보를 얹으면, 천칭이 조선일보 쪽으로 기울어지는텔레비전 광고를 내보내고 있었다. 광고 내용처럼 조선일보는 다른 모든 언론을 합친 것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당시엔, “조선일보 1면 하단에 광고 내는 게 골프장에 부킹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소연하던 시절이었다.

요즘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도 대다수 신문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세계, 국민 같은 신문들은 매년 수 백억 원씩 적자를 내고 있었다. 그 때도 한국일보는 부도 직전에서 간당간당 했다. 경향 사주였던 김승연 회장은,“한화 야구단보다 못한 놈들이라며 신문사 관계자들을 질책하기도 했다. 한겨레도 만성 적자에 허덕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시절에, 조선일보만은 나홀로 엄청난 흑자를 구가했다. “언론계 전체가 내는 세금보다 조선일보 한 회사가 내는 세금이 더 많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는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조선일보는 회사만 잘 나간 게 아니라, 소속 기자들도 잘 나갔다. 기사들 사이에서도 조선일보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언론계에서 조선일보 기자들의 보수나 대우가 가장 나은 편이었다. 다른 매체에서 취재력을 인정 받으면 조선일보로 옮겨가는 게, 일종의 코스처럼 여겨졌다.

당시는 신문기자들이 콧대가 셌다. 신문기자들은 방송기자를 아예 기자로 취급을 하지 않았다. 신문기자들은 방송기자들을제 손으로 기사 한 줄 제대로 못 쓰는실력이 형편 없는 기자들로 치부했다. 아예 동종업계 종사자로 끼워 주지 않으려는 분위기 마저 있을 정도였다. 

신문 기자 중에서도 조선일보 기자들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조선일보는 자신들이 문민정권의 탄생시킨 주역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정권을 가르치려 드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조선일보 기자들 중에 소위 “YS 장학생들이 있었다. 김 모 기자와 이 모 기자가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조선일보 고위층에서 이 장학생들에게,“정권에 비판적인 논조를 유지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장학생들은 그럴 수 없다. 차라리 사표를 쓰겠다며 버텼다고 한다. 그러자, 중앙일보가 이 기자들을 스카우트 해 갔다. 이건희 회장이 직접 이 기자들을 스카우트 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 모 기자에 대해서는 몇 마디 더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가 보기엔 그가 당대 대한민국 최고 기자 중의 한 명이었다. 취재력도 뛰어 났고 문장도 깔끔했다. 그는 오 실장의 경복고 후배라 그런지 오 실장과 아주 가까웠다. 그는 뻔질나게 부속실로 전화를 걸어 왔다.

눈치를 보아하니 주로 정치권 동향을 전달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전화해 올 때마다,‘기자라는 사람이 정보기관과 이렇게 유착해도 되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한편으로는,‘타고난 기자란 이런 사람을 말하는 게로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특히 중앙일보에 근무하면서 김현철 관련 특종 기사를 여러 번 썼다. 정치권 정보에 관한 한 그의 정보력이 최고였다.

당시 방송과의 강명О라는 젊은 수집관이 있었는데, 그는 이 모 기자의 서강대 신방과 후배였다. 수집관으로 나간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 요원이었다. 보통 수집관들은 하루에 두 세 페이지짜리 첩보 두 건을 쓰는 것도 힘들어 했는데, 강 수집관은 대 여섯 페이지 분량의 첩보를 대 여섯 건씩이나 써댔다. 그것도 한결같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들이었다. 그가 쓴 첩보는 이 모 기자의 취재수첩을 베껴 썼다는 말이 있었다. 정치과의 베테랑 수집관들은 한동안 이 젊은 수집관의 첩보내용을 확인하러 쫓아 다녀야 했다.

이 모 기자는 지난 2006년 인터넷 신문 대표 시절, 자신의 기자시절 취재 수첩을 다시 들추어 정치권의 지나간 일들에 대해 정치부 기자 23년의 기억들이라는 연재 기사를 썼다. 비록 철 지난 얘기였지만, 그의 연재물은 한결같이 흥미로운 소재들이었다. 내가 보기엔 내용도 대체로 정확했다. 그런데, 그는 10여 차례 연재하다 갑자기 연재를 중단했다. 나는 그가 연재를 중단하게 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 그의 취재수첩이 책으로 되어 나오면 재미 있는 내용이 많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 실장은 언론계 인사들과 유대를 중요시했다. 언론사 사주 중에서도 특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사주들과 가까웠다. 동아일보 사주가 해외로 나가면 해외 파견관들에게 특별히 지시하여 편의를 제공해 주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사주 일가들의 비리나 추문을 덮어주기도 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심지어 오 실장은 한겨레의 최학래 사장과도 친했다. 아마도 같은 고대 출신이기 때문에 둘이 가깝게 지내지 않았을까 짐작되었다.

한 번은 오 실장이 상을 당했는데, 최 사장이, “밤 늦도록 상가를 지켜 주겠다고 나섰다. “한겨레의 젊은 기자가 취재 올지도 모르니 내가 상가를 지키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상갓집에 한겨레 사회부 기자가 몰래 취재를 와서, “권력 실세의 상갓집에 대한민국의 요인이 전부 다 몰려들었다는 식으로 긁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조치하겠다는 의미였다. 한겨레도 알고 보면 위 아래가 다른 콩가루 집안이었던 셈이다.

오 실장은 각 언론사의 편집국장이나 정치부장 같은 핵심 간부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이들과는 정기적으로 자리를 만들었다. 모임에 나갈 때는 언제나 현금이 두둑이 든 가방을 가지고 나갔다. 소위 말해 촌지라고 하는 것이다. 촌지라고 하기보다는 뇌물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오 실장의 판공비는 대부분 기자들 촌지에 쓰인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에는, “안기부 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다라고 말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직접 보지 않아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한 번 나갈 때마다 수천만 원은 들고 나가는 것 같았다. 한 사람에게 족히 수백만 원은 돌아가는 액수였다. 물론 기자들의 직위에 따라 촌지의 규모는 조금씩 달랐다. 이러한 기름칠이 효력을 발휘한 덕분인지, 오 실장은 그 후 고비마다 언론의 도움을 받았다. 김대중 정권에서 그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언론들은 축소 보도하는 쪽으로 그를 보호해 주었다.

김영삼 정권에서 오 실장이 했던 역할은, 김대중 정권에서는 박지원 씨가 했다. 둘 다 언론을 조지고 얼러는 중책(?)을 맡았다. 나는 언젠가 박지원 씨를 도청한 미림팀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지금 이 시간에도 오정소 XX가 우리를 도청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사석에서의 그의 말은 TV에서 보던 것보다는 훨씬 더 거칠었다.

지난번 대북송금 특검에서, “오정소 차장이 박지원에게 김영완을 소개했다고 밝혀졌다. 정권 교체과정에서 오 차장과 박지원 간에 어떤 거래가 벌어졌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어쨌거나, “욕하면서 배우고, 싸우면서 닮는다는 말은 사실인가 보다.


이에 비해, 김대중 정권은 지난 1999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국세청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언론을 탄압한 적이 있다.

지난 90년대 중반 이후, 중앙일보는 조선일보를 따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삼성이 전폭적으로 지원했다한 때 판매 경쟁이 지나쳐, 지방의 배포 지국에서 칼부림 사건이 나기도 했다. 이들 기자의 스카우트도 이러한 경쟁의 산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