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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5. 문민정권의 뒤안길 II

21. “여의도 김소장입니다”

나는 문민정권의 화려한 비상과 허무한 결말이, “김영삼 대통령의 개인적인 성향에 많은 원인이 있다고 판단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들의 가려운 곳을 간파하고 충족시킬 줄 아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정권 초기에는, 이러한 성향 덕택에 국민들로부터 초유의 인기를 누렸다. 한 때 지지율이 90%대에 육박했다. 대통령 자신이, “지나치게 높은 지지율이 오히려 부담스럽다며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논리적이고 치밀한 사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평소 그의 지론은,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솔직해 인정한 셈이다. 그래서, 매일 아침 조깅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머리 좋은 사람을 찾아 쓰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그가 기용했던 수 많은 인사들은, 김현철을 통해 소개된, “이류인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어쩌면 체질적으로 일류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즉흥적인 사람이었다. 모든 일을 정치적인 에 의존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측근들도 대체로 하나 같이에 의존하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오정소 차장 같은 사람이 전형적인 사람이었다. 이들은 은 예리하고 순발력은 뛰어났지만, 논리는 허술하고 지구력은 부족했다. 골방에 앉아서 끼리끼리 작당하는 데는 능했으나, 광장에 나와 백년대계를 논의하기에는 턱없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문민정권은 기본이 안된사람들이 끼리끼리 작당하면서 망가졌다. 그 중심에는 항상 소산(小山) 김현철이라는 존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김현철의 국정농단이 심해질수록 정권은 더욱 심각하게 망가져 갔다. 망가지는 걸 알면서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대정실에 근무할 당시, 이미 김현철 씨의 국정개입은 너무 과도한 수준에 이르렀다. 일개 사인에 불과한 30대 젊은이가, 한 국가의 모든 인사를 주무르다시피 했다. 개각 때마다 기판국에서 5 배수의 추천 명단을 올렸는데, 이와 별도로 대정실에서도 따로 5 배수를 올렸다.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보고서는 당연히 김현철에게 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김현철에게 비판적인 자세를 보인 사람은 가차없이 잘려 나갔다.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경호실장도 그런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덕룡 의원도, “현철을 유학 보내라고 건의했다가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다.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청와대에서 거의 유일하게 현철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던 민병환 비서관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결국 안기부로 자리를 옮겼다.

 게다가, 문민정권은 권력 주변에 기생하는 잡쓰레기 인물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정권 초기부터 박태중을 비롯한 김현철의 측근들이 발호하고 있다는 첩보가 끊임 없이 올라 왔다. 장학로 청와대 제1 부속실장이, “주는 대로 먹는다는 소문도 일찍부터 나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뇌물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그의 구속으로 인해 문민정부의 개혁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백일하에 드러났다. 아무리 대통령 혼자 청와대에서 칼국수 먹어봐야 소용 없는 일이었다. 

오정소 실장에게는 찾아 오는 사람이 많았다. 내방객이 찾아 오면 주로 내가 정문으로 나가 에스코트를 했다. 문민정권의 초대 청와대 정책수석으로 내정됐다가 낙마한 전병민이란 사람도 오 실장을 자주 찾아 오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소위 『동숭동』 팀의 팀장이었다. 김현철 씨의 최고 핵심 측근이었다. 문민정권의 개혁의 밑그림을 그린 사람이었다. 그가 자주 내방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권력 내부의 문제를 서로 의논하는 것 같았다.

나는 김현철 씨의 전화도 여러 번 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전화할 때마다, “여의도 김소장입니다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여의도에 무슨 군인이 있어 여기로 전화를 하냐?’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여의도 사무소의 김현철 소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전화 매너만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말도 자근자근 신사적으로 했고, 나 같은 하급 직원에게도 항상 존댓말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참 후, 그가 한보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으로 떠밀려 구속까지 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가 어쩌면 억울해 할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구속되면서도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마 아직까지 모를런지도 모르겠다.

 말이 나온 김에, 김현철의 인맥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소개하겠다. 당시 시중에 우스개 소리 가운데, “우리 나라에는 지옥에까지 지부가 설치되어 있는 3대 패밀리가 있다는 얘기가 있었다. 바로 해병대전우회와 고대동문회, 그리고 호남향우회가 그 주인공들이라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 문민정부 시절에는 고대동문회가 힘을 썼다. 고대 출신이면서 특히 경복고 출신이 성골이었다. 경복고 출신들은 은어로 케이투(K2)”라고 불렸다. 아마 일제 때 경기고가 경성 제1고보(K1)였던 데 이어, 경복고가 경성 제2 고보(K2)였던 데서 연유한 것 같았다. 김영삼 정권을 PK 정권으로 보는 것은 조금 잘못 본 것이다.

물론 숫자상으로는, 부산 경남 출신이 많이 중용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개 육두품이었다. 기껏해야 진골이었다. 문민정권의 핵심 실권은 모두 경복고와 고대 줓신들이 좌지우지 했다.

문민정권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은, “김영삼 정권은 김현철을 중심으로 한 경복고/고대 세력과, 부산/경남고 세력 간의 알력 때문에 무너졌다고 말한다. 이는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당시 청와대 안에서는 이원종 정무수석과 김광일 실장이 사사건건 부딪혔다. 초대 비서실장이었던 박관용 실장도 김현철 일파에 의해 단칼에 밀려 났다. 내가 이미 언론에 밝혔듯이, 박관용 실장은 고등학교 동창과 저녁 먹으면서 대화한 내용이 미림의 도청에 걸려 전격 경질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초, 김현철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 될 즈음에 가서야 여론에 밀려 경복고/고대 세력의 중심이던 이원종 씨를 잘랐다. 이 수석은 별명이 핏대라고 불릴 정도로 정권을 방어하기 위해 핏대를 올린 장본인이었다. 기자들을 그를 혈죽(血竹) 선생이라고 조롱했다.

사실은, 이원종 수석이 잘리기 전에, 오정소 차장이 먼저 갈렸다. 오 차장은 1996 12월 중순, 연합통신에 기사가 나기 10분 전에 전격적으로 경질을 통보 받았다고 한다. 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YS의 친구였던 고 김윤도 변호사가 청와대에 들어가,“오정소를 잘라야 된다고 강력하게 건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아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오정소 차장은 퇴임인사 차 부내를 순시하면서 고대 후배인 박성도 정보비서관에게, “성도야 새로 오는 XX하고 잘해 봐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박성도 비서관은 권영해 부장의 최측근으로 근무하면서 국정원의 국내외 정보를 총괄하고 있었다. 오정소 차장이 말한 새로 오는 XX”는 박일룡 경찰청장을 두고 한 말이었다. 당시 박일룡 차장은 부산 세력의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초원복집 사건에서 영도다리를 언급했던 주인공이었다. 오 차장과 박 청장은 현직에 있을 때부터 서로 견원지간이었다고 한다.

오 차장과 이 수석의 전격 경질은 문민정권 몰락의 전주곡이 되었다. 1997 1, 여당은 안기부법 개정안과 금융개혁법을 날치기 통과시키려다 여론에 밀려 실패했다. 이 와중에 한보와 기아사태가 터져 나왔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나라 경제는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국가부도 사태가 전개되고 있는데도 김영삼 정권은 점차 정국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 갔다. 레임덕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식물정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김현철의 국정농단에 대한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언론은 확인되지 않는 기사를 양산하고, 야당이 부채질을 했다. 급기야 검찰이 김현철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정권을 방어하려고 총대를 메지 않았다. 새로 부임한 박일룡 차장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김현철을 난타하던 언론이, “예전 같으면 안기부가 보도 수위를 적절히 조절해 줬는데…”라며 의아해 할 정도였다. 김영삼 정권의 마지막 해에는, 정권이 통제불능의 상태로 빠지면서 나라 경제는 외환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정권 말기 권력의 공백이 가져 온 비극이었다. 

돌이켜 보면, 지난 『잃어버린 10년』간의 좌파 반역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김영삼 대통령 부자의 원죄가 컸다. 김 대통령의 무능력과 판단착오가 좌파들에게 집권의 기회를 제공했다. 김현철의 국정농단은 문민정권 스스로 몰락을 재촉했을 뿐만 아니라, 정권을 재창출 하는 데에도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정권이 말년에 접어들면서, 경제적으로 국가부도 사태가 났고, 정치적으로 국정파탄 사태가 터졌다.

언젠가, 문민정권 초기에 김영삼 대통령은 후계자 문제를 언급하면서, “깜짝 놀랄 인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당시 이 깜짝 놀랄 인사라는 사람은, 아마 이인제 씨를 지칭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 때부터 K2(경복고) 세력들은 이인제 씨를 은밀히 미는 분위기가 있었다. 같은 경복고 출신이라도 김덕룡 씨나 김한동 씨는 일찌감치 대상에서 제외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이들이 경복고 출신에 집착하다 보니, 경기고 출신이었던 이회창 씨를 배제하고 경원시 했다는 점이다. 경복고 출신들은 마치 자신들이 온정을 베풀어 이회창 씨를 감사원장으로 영입하고 국무총리까지 시켜줬다고 믿는 것 같았다. 이회창 씨가 총리의 헌법상 권한을 강조하는 등 깐깐하게 나오자, 한동안 견제하는 듯 하더니 기어이 낙마 시키고 말았다.

그 후 이들은 이회창 씨가 신한국당의 총재가 되고,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고 난 후에도 이회창 씨에 대한 의구심을 풀지 않았다. 아마 이회창 씨의 인간됨이나 성향으로 볼 때, “칼자루를 꺼꾸로 들이댈 것이라고 판단하는 듯 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회창 후보와 끝내 갈라서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정권이 김대중에게 넘어 가고 말았다.

김영삼 측으로서는, ‘김대중에게 정권이 넘어 가는 것이 퇴임 후 안전을 보장받는 데 더 이로울 것이다고 계산했었을 것이다. ‘김대중은 약점이 많은 사람이니 자기를 겨누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법했다. 나는 이 부분이 김영삼 정권의 가장 큰 실책이었고, 또한 비난 받아 마땅한 부분이며,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나라를 부도냈기 때문이 아니라, 반역정권의 탄생에 공헌했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 김대중 정권 때에는 호남향우회가 모든 것을 독차지했다. 양 정권의 차이점이라면, 김영삼 정권 때에는 눈치껏지역안배를 하는 시늉이라도 냈지만, 김대중 정권에서는 그나마 눈치껏하는 것조차 과감하게(?) 포기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주간동아 2005. 8. 2 , “대통령 비서실장, 경호실장도 도청했다제하 기사 참조.

 초원복집 사건은 대선 직전 정주영 후보 측에서 김영삼 후보 측근들을 도청한 사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