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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 프로젝트(연재중)

13. 장춘에서 오슬로까지 1997년 10월, 전대미문의 폭풍이 대한민국을 덮쳤다. 아시아를 휩쓴 사상 초유의 외한위기가 전국을 강타한 것이다. 나라가 부도 직전에 몰렸다. 기업은 줄도산하고 수많은 실직자들이 거리에 나앉았다. 세계화니 국제화니 하고 떠들면서 요란스레 OECD 가입 축하 샴페인을 터뜨린 지가 엊그제인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냈다. 국민들은 외환보유고를 조금이라도 채워 보려고 장롱 속 금붙이들을 꺼냈지만, 대한민국은 결국 580억불의 긴급 구제금융을 받고 IMF의 간섭을 받는 처지가 됐다. 양세훈 호놀룰루 총영사가 노르웨이 대사로 전근 발령을 받았던 것은 IMF 위기가 터진 직후였다. 권영민 대사의 후임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지상천국과 같은 하와이에서 3년을 보내고, 춥고 음울한 .. 더보기
12. “자네 출세했네” 권영민 대사는 지난 1998년 1월, 청와대 의전수석으로 낙점되었다가 1 주일만에 낙마하는 바람에 유명세를 탄 사람이다. 그 일이 있은 지 10년 후인 2008년, 그는 “자네 출세했네”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그의 외교관 인생과 최규하 대통령과 홍기 여사와의 인연을 잔잔하게 추억하는 내용이다. 최규하 대통령의 국무총리 시절에 권 대사는 그의 보좌관을 지냈다고 한다. 책 제목도 최 대통령이 자신에게 한 말을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책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바로 노벨평화상과 관련한 부분이다. 아래 설명은 그의 책에서 인용한 것인데,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가 노벨평화상과 처음 엮이게 된 것은, 1994년 아틀란타 총영사로 부임한 이후다. 당시 한반도의 핵위기가 한창 고조되자 카터 전 .. 더보기
11. 비운의 망명객 1 평소 그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그의 얼굴은 희노애락의 감정이 모두 다 떠나 버린 사람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인간적인 감정이란 게 그에게는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망명함으로써 가족과 친지, 부하 등 수십명이 죽음으로 내몰렸을터이니 그 죄책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그의 얼굴에서 생기가 돌 때가 있었다. 바로 조국의 통일을 역설할 때가 그랬다. 그럴 때면 그의 얼굴에는 격렬한 감정의 파도가 피어오르곤 했다. 그의 설명이 김정일 정권에 대한 비판에 이르면 목소리의 톤이 달라지곤 했다. 『나는 오랫동안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 살아왔다. 처음에 나는 그 허위와 기만이 근로인민대중의 해방을 위하여, 즉 착취계급과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 더보기
10. 국정원 외신 대변인 원론적인 수준에서 말하면, 정보기관은 굳이 입이 필요 없는 조직이다. 비밀이 최우선인 기관인데, 무슨 할말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정보기관에서 대변인은 불필요한 존재다. 당연히 대한민국 정보기관은 대변인 없이 지내왔다. 적어도 국민의 정부 이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갑자기 국정 홍보가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정보기관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삐딱한 신문쟁이들은 김대중 정권을 일컬어 "홍보공화국"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이는 전혀 무리한 말이 아니었다. "홍보에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오히려 곱게 불러준 것일런지도 모른다. 김대중 정부의 대언론 업무는 주로 박지원 공보수석이 맡았다. 그가 1999년에 공보업무와 노벨상 업무를 전반적으로 조율.. 더보기
9. 대외협력보좌관실 1998년 2월, 김대중 정권이 출범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이름하여 “국민의 정부”라고 했다.국가안전기획부 직원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치루는 홍역이었지만 이번 정권 교체의 여파는 어느 정도일런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새로 대통령에 취임한 사람은 바로 자신들이 납치하고 감금하고, 상시적으로 미행, 도청하고 탄압했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안기부의 전 요원들은 마치 마치 최종 선고를 앞둔 사형수들 마냥 다가올 개혁의 칼날 앞에 숨죽이며 기다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초대 정보기관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이종찬이었다. 그는 중앙정보부 공채 1기로 정보부에 입사하여 20여년간 정보기관에서 잔뼈가 굵은 정보 베테랑이었다. 지난 1979년 10월, .. 더보기
8. 장막 뒤의 연출가 2003년 1월 30일, 필자가 "회칠한 가면, 악마의 초상"이라는 글에서 김한정이라는 인물을 세상에 처음 소개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에서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언론에 보도된 적도 거의 없었다. 수년 동안 청와대제1부속실장이라는 핵심적인 자리에 있었지만, 청와대 출입기자들도 그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철저하게 베일에 싸인 미스테리의 인물이었다. 장막 뒤의 사람이었다. 김한정, 그는 과연 누구인가? 먼저, 그의 삶의 궤적부터 살펴보자. 김한정은 경상남도 함안 출신으로, 휘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82학년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당시 많은 학생들이 그런 것처럼, 대학 재학 중에 열성적인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대학교 마지막 해인 1985년 11.. 더보기
7. "자네가 역할을 해줘" 2002년 4월 12일 금요일 저녁. 서울 삼성동 오크우드 호텔. 여섯 명의 중년 남자가 이 호텔의 어느 객실로 모여 들었다. 참석자의 면면을 보면, 최규선 미래도시환경 대표, 김희완 서울시 정무부시장, 최성규 경찰청 특수수사과장, 송재빈 타이거풀스 사장, 이창현 (최규선의 이종 사촌형), 그리고 임철웅 (최규선의 자서전 대필 작가)이었다. 이들은 곧 있게 될 최규선의 검찰 소환에 대해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이 호텔에 모인 것이다. 벌써 세번째 모임이었지만, 무슨 뾰쪽한 대책이 나올 리 만무했다. 청와대는 그에게 미국으로의 밀항을 강요하고 있었다. 최성규는, “내일이라도 당장 한국을 떠나자”며 최규선을 압박했다. 그러나 최규선은 “밀항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며 거절했다. 서로 옥신각신하기만 했다... 더보기
5. “블루카펫을 깔아라” 2002년 10월 9일, 16대 대통령 선거 열기가 한창 달아오르던 즈음, 주간 뉴스위크지는 도발적인 기사를 내 보냈다. 제목부터 선정적이었다. “블루카펫을 깔아라.” 봇물처럼 터져 나온 이런 저런 게이트 사건으로 이미 그로키 상태에 빠져 있던 김대중 정권에게는, 마치 최후의 일격같은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동안 성역으로 여겨지고 있던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는 장면이었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노벨평화상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로비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뉴스위크 한국판은 최규선(42·미래도시환경 대표)씨의 노벨평화상 만들기 작전인 ‘블루 카펫’(Blue Carpet)과 ‘M 프로젝트’ 문건들을 단독으로 입수했다. 이 두 개의 노벨상 프로젝트는 98∼99년 사이 국민.. 더보기
4. 역사에 남을 인물 양준용이라는 분이 있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 LA지역에서는 꽤 유명한 원로 언론인 중의 한 분이다. 미국 최대의 한인 방송사인 LA 라디오코리아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 방송의 시사좌담 “토요 스페셜”에 단골 초대 손님으로 출연한다. “토요 스페셜”은 최영호 부회장이 직접 진행하는 라디오코리아의 간판 프로그램인데, 미국 동포 사회에서 인기 있는 프로그램 중의 하나다. 지난 2010년 9월 4일, 양준용 고문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인간 김대중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라는 주제로 대담한 적이 있다. 그 전주, 그러니까 2010년 8월 마지막 주에는, 마침 필자가 동 프로그램에 출연했었다. 그 때 필자는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라는 책의 출판과 관련된 얘기를 주로 했었다. 양 고.. 더보기
3. 13전 14기의 신화 “나에게는 소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벨평화상을 타는 것입니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김대중은 사석에게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지난 1971년 그가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박정희 정권을 위협하는 득표력을 보였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그저 깜짝 스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후, 해외를 떠돌면서 반유신 활동을 하다가, 1973년 8월 동경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납치되면서부터 일약 국제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호자로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덕택에 그는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에서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국제 여론에 힘입어 미국으로 도피할 수 있었다. 그의 길고 긴 노벨평화상 도.. 더보기
2. 엇갈리는 반응들 수상 발표가 있은 다음날 아침, 청와대에서는 작지만 뜻깊은 행사가 거행되었다. 다음은 월간중앙이 보도한 내용.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이 발표된 뒤 정확히 13시간이 지난 10월14일 오전 9시. 청와대 녹지원에서 집무실로 향하는 도로 양켠에는 청와대 비서실, 경호실 직원 300여명이 도열해 있었다. 이날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신 김대중 대통령님을 축하해 드리는 자리에 전 직원은 참가하라”는 구내방송을 듣고서였다. 아침 9시20분경, 출근하는 김대중 대통령을 태운 1호차가 관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직원들의 도열 행렬이 시작되는 녹지원 가까이에서 이내 멈춰서고 김대중 대통령이 승용차에서 내려섰다. 박수가 쏟아지고 눈길이 마주친 직원들의 목례가 이어졌고, 김대통.. 더보기
1. 수상자 “김대융”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는 한국과 동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점을 인정하여, 김대융 대통령에게 2000년도 노벨평화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수십년간 독재정치가 계속되는 동안 여러차례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오랜 기간 망명생활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그 나라의 민주지도자로 부상했다. 그가1997년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한국은 전 세계 민주국가의 대열에 결정적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민주적인 정부를 강화하고 나라 안의 화해를 촉진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김 대통령은 또한 보편적 인권의 주도적인 수호자로서, 강력한 도덕적인 힘을 바탕으로, 아시아에서 인권을 제한하려는 시도에 맞서 왔다. 그는 미얀마의 민주주의와 동티모르.. 더보기
프롤로그 - 마침내 망명이다 일년전 이맘때, 2011년 12월 11일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날은 오랫 동안 끌어오던 망명 문제가 최종 마무리된 날이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미 이민국 담당 검사와 8년째 씨름 중이었데, 마침내 그 날, 미 필라델피아 미민 법원의 찰스 허니맨 판사로부터 “정치적 망명을 허락한다.”는 최종 판결을 통보 받았다. 그 판결 덕택에, 나의 가족은 비로소 “강제추방”이라는 해묵은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동시에 나를 송환시켜 진실의 입을 틀어 막으려던 국정원의 오랜 노력도 결국 수포로 돌아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정원은 나의 망명 가능성을 부인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나의 주위를 압박하고 있었다. 나는 2003년,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과 반역적인 대북송금 문제, 임동원의 간첩 혐의, 그리고 김대중.. 더보기
주인공 소개 우선, "NP 프로젝트"의 주인공부터 소개하지요. 이름은 김한정이라고 하고요, 아래 사진 별표 안의 인물입니다. 김대중 노벨상 공작의 핵심 인물이었고요, 1999년 12월부터 청와대 부속실장과 동교동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김대중의 "문고리 권력"을 잡았던 사람이죠. 9월 24일, 문재인의 이끌고 가서 이희호에게 문안인사를 시키더니, 그후부턴 문재인의 수행실장을 맡았군요. 11월 21일, 안철수와의 단일화 토론에도 참석한 걸로 보아, 안철수를 주저 앉히는 데도 모종의 핵심 역할을 한 걸로 보여지고요. 더보기
책머리에 우여곡절 끝에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를 발간한 지 어언 2 년여 세월이 흘렀다. 기대 이상으로 많은 분들이 관심과 사랑을 주셨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필자는 지난번 책에서 김대중이 추진한 노벨상 공작의 줄거리는 대충 소개했지만, 공작의 세세한 내용은 다 알리지 못했다. 많은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필자의 마음 한 켠에 그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늘 남아 있었다. 그동안 필자는 여러차례 정부가 이 문제를 정식으로 수사해 주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은 시종일관 눈치만 살피며 미적거렸다. 이제 필자가 직접 노벨상 공작의 전모를 설명하지 않고는 도저히 진실을 드러낼 방법이 없게 되었다. 노벨상 수상과 대.. 더보기
《NP 프로젝트》김대중 노벨상 공작의 전모 NP 프로젝트 노벨평화상에 눈이 멀어 대한민국을 반역한 김대중의 검은 발자취, 그 전모를 밝힌다 김기삼 저 나의 아내 김상미에게 인내와 헌신과 사랑에 감사하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