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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인터뷰/미주 한국일보 - 나는 진실을 봤다

인터뷰 - 미주 한국일보 (2004.7): 나는 진실을 봤다

'나는 진실을 봤다'


미 망명 신청한 전 국정원 직원 김기삼,

DJ 노벨상 수상, 대북 15억 달러 불법송금 등 의혹 폭로

광야의 외침이라고 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메아리도 없는 외로운 고함을 치고 있는 심정이라고 했다. 국가정보원에 7년 몸담았다 사표를 던진 후 최고 통치자에 비수를 들이댔던 김기삼(金基三·40)씨다.

2003년 정초, 인터넷 언론에 김대중 정부의 의혹들을 폭로하며 우리 사회에 메가톤급 폭격을 가한 그다. 그의 도발적 주장들은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공작 ▲김대중 정부의 15억 달러 불법 대북 송금 ▲국정원의 불법 도청에 맞춰져 있었다. 심지어는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간첩이란 충격적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불순한 정치적 혐의에 진위 논란이 겹치며 화제를 불러일으킨 그의 폭로는 그러나 시대의 물결에 이내 묻혀 물보라에 그쳤다. 2001년 도미한 김씨는 결국 지난 3월 미 망명을 신청하며 조국을 등지는 선택을 했다. 가족과 함께 워싱턴서 2시간여 거리에 체류중인 김씨를 만나 폭로의 진의와 주장의 진실, 그리고 망명을 한 이유 등을 들어봤다.

) 망명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망명신청을 했지만 현재 이민재판에 걸려 있다. 학생비자 신분으로 체류해왔는데, 수업을 자주 빠지면서 신분이 끊겼고 이민국에서 추방재판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다. 아내와 두 자녀는 망명사무소를 통해 망명신청을 밟고 있는데, 가족들의 망명신청이 받아들여지면 나도 추방재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

) 왜 망명을 택했나.

국정원 퇴사 후 언론인 C씨에 DJ 정권의 의혹들을 귀뜸해 줬는데, 노벨상 공작의 핵심인 김한정( DJ 비서관)에 소식이 새나갔다. 또 나를 포함한 10명 이내의 사람들만이 아는 정보가 국회 발언이나 언론에 보도되면서, 내가 의심받을 상황이었다. 더 이상 국내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뉴욕에 변호사 시험 보러 간다고 소문 낸 후 도미했다. 지난해 DJ 정권의 비리들을 폭로하면서 고국에서 정치적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 작년 12월부터 망명 절차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
그가 지난해 1월 인터넷 언론에 DJ정권의 의혹들을 게재하자 국정원은 그를 지난해 2월 명예훼손과 국정원 직원법 위반혐의로 고소했다.)

) 당신의 폭로내용은 얼마만큼 사실에 가까운 것인가.

그 중에는 증권가 찌라시 수준도 몇 개는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 주장의 대부분은 진실이라 확신한다. 오랫동안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의혹을 추적한 것이다.”


) 왜 폭로를 결심했나.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그러나 DJ 정권이 대북송금 문제를 2억 달러만 인정하고 덮으려 하는 걸 보고 그대로 있을 순 없었다. 대중 정권이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대북정책을 그토록 오랫동안 일관되게 잘못 추진한 근본이유는 노벨상에 대한 지독한 노욕 때문이었다.

DJ
는 노벨상을 수상할 목적으로 국가정보원을 동원해 해외공작을 진행하는 한편, 북한의 김정일에게는 약 2조원에 달하는 뇌물을 제공하였다. 김대중김정일 간의 은밀한 뇌물 뒷거래는 이러한 배경아래 이루어졌으며, 결과적으로 보면 DJ는 국민의 혈세로 이루어진 공적 자금을 현대에 지원하면서 현대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챙긴 것이다.”

) 시대착오적 주장이 아닌가.

물론 내가 이야기하면 김용갑(한나라당 의원)처럼 보일 것이다. 과거 국정원이 정권과 관련된 것은 왜곡이 있었으나, 안보와 관련해서는 장난질은 안친다.”

) 햇볕정책의 성과마저도 부인하는 것인가.

햇볕정책도 일면적 타당성이 있다. 나도 북한을 지원하고 교류하는 데는 동의한다. 다만 개인적 야심과 이해관계로 왜곡 당했다는 게 문제다. DJ는 취임 후 삼국통일보다 더 큰 일을 한 지도자로 만들어달라고 우리에 지시했다. DJ 우상화 작업하라고 위에서 지시가 내려온 거다. 개인적 야욕과 노욕을 위해 김정일 뒷주머니에 찔러준 돈은 인민들 탄압하는 데 쓰였다.”

) 지난 대선 때 당신이 제보한 폭로내용을 한나라당은 공개하지 않았다. 당신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은 것 아닌가.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의 특보인 이병기국정원 차장에 제보했으나 질질 끌기만 했다. 직접 한국에 가서 기자회견을 하고 내가 보관중인 자료도 깰려고 했다. 한나라당이 앞서 국정원 자료를 3번이나 폭로했으나 반응이 시원찮자 대선에서 부정적 영향을 우려해서 내 주장들을 묵살한 것으로 보인다.”

) 한국의 안보상황이 위험하다고 처방 내리는 근거는 무엇인가.

국정원에서 나는 진실을 봤다. 사람들이 나를 수구꼴통이라 욕할지 모르지만 친북세력들은 우리 권력 핵심 깊숙이 빨대를 꽂았다. 내부 정보가 북에 보고될 것이다. 김정일은 현재 남한을 혁명이 무르익은 단계로 보고 있다. 미국만 없으면 남한은 1주일 꺼리도 안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안보가 굉장한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하는 것이다.”

) 국정원에 입사한 동기는 뭔가.

나는 84학번이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고시를 경멸하던 분위기여서 1차 시험도 치지 않았다. 나는 극악한 좌편향이었다. 독재와 싸우며 독재를 닮아가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 학생운동과 조직활동은 하지는 않았다.”

나는 반미운동의 실체인 미국을 알고 싶어 카추사를 지원했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사노맹이 일망타진되는 걸 보며 국정원에 들어가 직접 그들을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입사했다. 또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폭로를 지켜보며 정보기관에 관심을 가졌다. 나라의 핵심에 들어가 국가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보고 싶었다.”

(
김씨는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1993년부터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의 전신) 7급 직원으로 입부, 2000 10월말 사직했다.)


회사를 그만 둔 것은 DJ정권을 지켜보며 보통 사람들은 더럽다고 하며 그냥 참지만, 나는 여기 아니면 벌어먹고 못살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 하위직으로서 국정원의 고급정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었나.

나는 비록 하위직이긴 하나 해외, 국내, 대북부서를 두루 거쳤다. 내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또 중요 정보에 근접할 수 있는 핵심 보직에 근무했었다. 내가 모르는 것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내 일을 넘어 그 동안 대한민국 전체를 보고자 했다. 그런 노력이 있어 그런 폭로가 가능했다.”

) 어떻게 살고 있나.

”2001
11월 단신 도미했다. 이듬해 봄, 가족을 데리고 입국해 현재 펜실베니아주 해리스버그에 체류중이다. 벌이가 없어 월 400달러짜리 정부 보조 프로그램 아파트에서 산다. 한국의 가족들에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 있다. 가끔 워싱턴에서 시장도 보고 나들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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