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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인터뷰/독립신문 - 김대중 노벨상 공작 폭로 전 안기부 직원

인터뷰 - 독립신문 (2003.1.30): 김대중 노벨상 공작 폭로 전 안기부 직원

독립신문 인터뷰  (2003년 1월 30

 

 


) 국정원에서 근무할 때 노벨상 로비팀에 직접 참여했나?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다. 노벨상 로비는 극비로 진행된 일이었다. 그러나, 한정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지근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김한정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한 건 3개월 여 정도된다.

 

)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라 사람들이 반신반의한다.

 

내가 밝힌 내용은 거의 사실이다. 그만큼 자신 있다. 내 글을 인용해서 기사화 하더라도 나중에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당시 김한정씨는 국정원에서 어떤 일을 했나?

 

독립신문이 기사에서 그를 대외협력보좌관이라고 썼던데, 그것은 아니다. 대외협력보좌관은 다른 분이 있었다. 김한정이종찬 원장의 지시에 따라 노벨상 수상공작을 전담했다. 사무실에는 김한정과 나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10여명이 근무했다. 각자 다른 일을 했다. 나는 해외 홍보업무를 맡았다.”

 

) 김한정씨를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나?

 

김한정씨는 99 5월말에 회사를 떠나고 나서 아태민주지도자회의로 되돌아갔다. 그는 99 7월에 김대중 대통령에게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안겼다. 그 일로 김한정김대중에게 크게 신임을 얻었다. 99 8월에 김한정은 국정원에서 같이 근무하던 젊은 직원들을 불러 크게 한 턱 냈다. 그때 김한정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 노벨상 로비에 쓰인 자금이 어떻게 북한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인가?

 

“내가 듣기론 대부분의 돈이 유로화로 건네졌다고 한다. 한날 한시에 전달된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나누어서 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환전관계는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

 

) 국정원에서 김기환씨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소문도 있다.

 

일을 극비로 추진했기 때문에 노벨상 로비 부분을 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하다. 국정원 내에서조차 이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때문에 국정원이 나의 존재를 부인하고 싶을는지도 모른다.”

 

) 일부에서는 지난 대선 전에 터트릴 일이지, 왜 이제서야 터트렸냐고 의구심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실 대선 전에 국내로 들어가 한나라당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한나라당에서 나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왜 그랬는가?

 

이유야 확답할 수 없지만, 내가 짐작컨대 자기들이 메가톤급 효력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폭로했던 메모보고서(도청자료)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자 이 일도 반신반의한 것으로 보인다.”

 

) 당시 한나라당에 가져 간 자료는 아직도 있나?

 

그건 전화상으로는 말하기는 어렵다. 내가 국내에 들어갔다 나온 후에 주위의 동료들이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몸조심을 하고 있다.”

 

) 혹시 여권과 이 문제를 가지고 상의한 적이 있나? 대북뒷거래자금 2억 달러가 터져 나온 시점과 묘하게 일치해 여권의 각본에 의해 이 두 건의 일이 터진 게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그런 적 없다. 단지 오마이뉴스가 2억 달러 문제를 기사화하는 것으로 보고 청와대가 일부만 인정하고 대충 뭉기고 지나가려 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기사를 보고 나도 터트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김대중이 퇴임하기 전에 이 문제를 공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을 공개하기 이전에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 추가로 폭로할 내용이 있나?

 

할말은 많지만, 당분간은 일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지켜보겠다.”


 



독립신문과의 2차 인터뷰(2003년 2월 4)

 


) 국정원의 발표내용을 보았는가? 당신의 주장을 허무맹랑한 주장이라면서 당신이 성격이상자라고 발표했다.

 

나도 보았다. 국정원의 반응이 매우 신경질적인 것 같다. 국정원으로서는 그런 식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굳이 재반박할 필요를 못 느낀다.


내가 성격 불안정으로 인해 정보업무에 적응하지 못해 자주 옮겨 다녔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내가 학력고사에서 남들보다 좀 잘 찍어서 소위 일류대학이란 델 나왔다. 그것이 여러 부서를 옮겨 다니는 데 좀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평소 주위 사람들과 원만한 인관 관계를 유지한 것도 자구 옮겨 다닐 수 있는 여건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 국정원에서는 당신이 해외정보업무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좀 많이 아는 편이다. 대한민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 일부러 국내, 해외, 대북 부서들을 섭렵했다. 한반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부서를 자주 바꾸면 인사상 불이익으로 돌아온다. 사실 차장 산하를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같은 국내 차장 산하라 하더라도 수사에서 정보로 옮기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능력과 품성을 인정받아야 가능한 일이다. 내가 내 얘기를 하는 것이 좀 쑥스럽지만, 나는 내 업무에 자신이 있었고, 주위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주위의 평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능력이 없고 성격이 불안정한 사람이라면 해당 부서에서 나를 불렀을 이유가 없다. 대외협력보좌관실만 하더라도 국정원에서 가장 유능한 인재를 뽑아야 썼다. 내가 성격이상자라면 그 팀의 팀장이 나를 불러 같이 일했을 리가 있겠는가. 나랑 일하는 것이 불안하면 나를 불렀을 이유가 없지 않겠나? ”  

 

) 국정원에서는 폭로하지 말아달라고 회유를 한 적이 없고, 그럴 필요성도 없었다고 한다.

 

 동아일보 기자와 통화했는데 뭔가 커뮤니케이션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국내에 들어갔을 때 국정원 간부로부터 폭로하지 말아달라는 회유를 받은 적은 없다. 사실 국정원 간부를 만나기는커녕 국내 체류기간 동안 내내 숨어 지냈다. 집에도 못 들어가고 찜질방을 전전하면서 잤고, 전화도 공중전화만 이용했다. 동아일보 기자가 뭔가 오버한 것 같다.” 





독립신문 3차 인터뷰 (2003 2)

 

황장엽씨로부터 용기를 얻어,


국민들이 현실을 직시하게 하자는 차원에서 공개

 

한편 김기삼씨는 노벨상 폴로 배경과 관련, "평소 황장엽 선생으로부터 많은 용기를 얻었다."고 밝혔다. 그는, "국민들이 오도된 정보와 여론조작 등으로 판단력을 상실하고 있는 상태에서 한반도 위기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국민들에게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직시할 수 있도록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에서 글을 발표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0년 10월 27, 국정원을 퇴사하기 하루 전, 황장엽 씨를 찾아가 작별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는, "나는 황장엽 선생님이 국정원 내에서 일주일 한 번씩 개최한 세미나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었다." 면서, "회사를 떠나면 다시는 만나 뵐 수 없을 것 같아 곶감 한 접을 사 들고 찾아 뵈었다."고 말했다.

 

그는 황씨에 대해, "소설가 이문열씨는 황 선생님을 가리켜 '조롱 속에 매'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황 선생님을 일러 '쪽 방에 갇힌 대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나는 황선생님을 존경한다현재 지구상에 살아 숨쉬는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지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황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인간중심주의자로 개종했다.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농담조로 '난 황장엽주의자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황장엽 씨는 작별인사 자리에서, "북한을 조금만 더 봉쇄하면 곧 붕괴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망명했는데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는 바람에 모든 것이 틀어져 버렸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황씨는, "내가 정세를 오판하여 가족들을 희생시켰다."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는 황장엽 씨와 얘기할 때, "중요한 대목은 필담으로 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김기환씨는 그 자리에서 황씨에게, "선생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대통령이나 원장(임동원)이 알아서 잘 할 겁니다. 훌륭한 분들이니 김정일에게 당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설마 대한민국이 북한의 의도대로 끌려가서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는 일이야 있겠습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로 안심시켜드리려 했더니, "황선생님의 눈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감과 허탈감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치 황씨가 "'국정원에서 그나마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너도 그 정도 인식 밖에 못하느냐?'고 말씀하시는 듯 했다."고 한다

 

김기환씨는, "그때 황선생님의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면서, "작별인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황선생께서 갇힌 몸이 되어 이루지 못한 일을 내가 대신하겠다."고 결심했었다."고 밝혀 이번 일을 결심하게 된 배경을 비치기도 했다.

 

김기환씨는 계속하여, "작별인사를 마치고 나오자, 밖에서 황선생님을 관리하던 홍모 팀장이라는 분이 '김선생, 여기서 나가시면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절대 말하시면 안됩니다.'라고 했다."면서, "황선생님의 일거수 일투족이 철저히 감시되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내가 황선생님께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 놓은 것은 밖에서 다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황선생님 관리팀장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감시하고 있음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황선생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인간중심철학의 몇 가지 문제라는 책자는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성경과 함께 항상 가까이 놓아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그 책자는 시대정신이라는 출판사에서 인쇄하여 제본까지 마친 상태였는데, 국정원에서 판매금지 처분을 내려 결국 시판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황씨의 처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얘기를 요구하는 기자에게 김기환씨는, "당시 황장엽 선생님은 철저히 활동의 제약을 받고 있어 하고 싶은 말도 못하는 부자유스런 상황에 처해 있어, '가족까지 버리고 남한으로 내려온 결과가 이것인가?'하고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고 전했다. 김씨는, "황 선생님은 외부 인사를 접견할 때마다 '자살하고 싶다.'고 토로하셨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아마도 삶의 의미를 찾기가 어려운 때였을 겁니다."고 회고했다.

 

외부인사 만날 때마다 "자살하고 싶다

 

이와 관련하여 관련 하여 김기환씨는 자신과 황장엽 씨와의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사실 황 선생이 활동금지를 당한 것은 저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1999 4월 말, 일본 산께이 신문의 구로다 기자가 끈질기게 황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요구해 왔는데, 저의 팀장이 황 선생 대신 김덕홍 선생과 인터뷰를 주선해 주었습니다. 당시 김기환 씨는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해외홍보를 담당하면서 황씨의 해외언론 인터뷰 일정을 관리했었다고 한다.

 

"김덕홍 선생이 인터뷰에서 '황선생이 북한의 전병호 군수비서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북한이 핵무기를 5개나 보유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 산께이에 보도되었는데, 이 산께이 기사가 다시 한국의 언론에 인용 보도되면서 큰 파장이 일어 났습니다. 이에 당황한 국정원 측에서는 그 후 황 선생님의 외부 활동을 전면 금지시켰습니다. 당시 나종일 차장이 황선생을 직접 불러 외부활동과 강연을 금지한다는 조치를 전달했습니다."

 

"그 후 황선생님이 외부로 의견을 전달하던 유일한 창구였던 탈북자동지회의 회지도 2000 7월 황선생님이 발표한 6.15 정상회담관련 기사 때문에 일방적으로 폐간 조치를 당했습니다. 당시 이 기사는 남북정상회담의 본질을 정확히 분석한 탁월한 견해였는데, 이에 격노한 임동원 원장이 회지를 강제로 폐간시켰습니다. 이후 황선생님의 고뇌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 후에는 거의 유폐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는 2 13일 황장엽 선생의 팔순 잔치가 예정되어 있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황선생님께 희망을 잃지 마시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그는 팔순 축수를 전해 달라면서, "황선생님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사셔서 영광의 그날을 꼭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김기환씨는 현재 생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에서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그가 또 어떤 메시지를 던질 것인지 주목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