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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증언/임동원의 간첩 의혹

임동원의 간첩 의혹

분칠한 가면, 간첩의 초상

- 임동원의 간첩 의혹 -




1. 서언


국민 여러분께 다시 드립니다. 


조국의 안보 현실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짙은 핵구름이 한반도 상공을 향해 빠른 속도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깨어나셔야 합니다.


어제(2003년 2월 14일)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 뒷거래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해명을 내놓았습니다. 저는 인터넷을 통해 그 내용을 접하고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예전에“김대중은 뒤돌아서면 거짓말을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김대중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거짓말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 뻔뻔스러움에 아연할 따름이며, 영원히 구제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차라리 동정심이 일어날 정도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만, 저는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대북 뒷거래가 이루어졌으며 그 금액은 미화로 15억 달러라고 주장합니다. 


김대중은 노벨상, 4 ‧ 13 총선, 그리고 정계개편을 겨냥하고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었습니다. 지난 5년간, 금강산관광 댓가 등을 포함하여 북한에 보내진 돈은 약 30억 달러에 달합니다. 특검을 통한 철저한 수사만이 이러한 뒷거래를 확실히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 규명을 위한 국민 여러분의 의지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저는 지난 번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편지에서, 이 악마적 정권의 위선의 가면 뒤에 숨겨진 김대중의 본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이번 편지에서 저는 이 정권에서 소위‘햇볕정책의 전도사’라고 불렸던 임동원 씨의 가면을 벗겨 그의 진면목을 국민 여러분께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2. 임동원에 대한 의혹


사실 그동안 임동원 씨에 대해서는 세간에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출신 배경이 어떻다거나, 6 ‧ 25 전쟁 중의 행적이 어떻다거나, 육사 입학시 거물간첩 최덕신이 신원보증을 섰다거나 하는 등 여러 말들이 많았지만, 저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재론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가 국정원에 재직하면서 직접 보고 들었던, 그러나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을 중심으로, 임동원 씨의 의심스런 행적에 대해 국민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물론 이번에도 판단은 전적으로 국민 여러분의 몫입니다. 


저는 이 악마적 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 언제부터인가‘우리나라의 권력 핵심에 북한의 고정간첩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김정일 같은 교활한 자는 남쪽의 심중을 정확히 꿰뚫어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남북대화에 응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랫동안‘만약 간첩이 있다면 과연 누구일까?’하고 혼자서 남몰래 이 문제를 고민해 왔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임동원이 간첩일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해 6월 서해사태 때 임동원 씨는 북한의 무력도발을“우발적인 사태”라고 예단(豫斷)하면서 김정일의 지시와 개입을 부정하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대북 첩보에 의하면, 김정일은 1999년 6월 서해교전 후 해군사령관에게“1년간의 시간을 줄 테니 반드시 보복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북한 해군은 보복 역량을 기르는 데 시간과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1년 안에 그 지시를 이행하지는 못하고, 3년이 지난 후에야 그 명령을 정확히 수행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임동원 씨가 서둘러 북한을 감싸고 돈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간첩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임동원 씨가 맹목적으로 북한을 감싸고 돈 것은 비단 그때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99년 서해교전 시에도 임동원 씨는 북한의 의도적인‘영해 침범(侵犯)’을 굳이‘단순 월선(越線)’이라고 의미를 축소시키면서 북한의 도발을 호도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지난해 6월, 육사 교수 모임에서도 한반도 긴장 고조의 책임을 미국의 전쟁 협박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김정일을 두둔하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끝도 한도 없을 정도입니다.


한편, 임동원 씨는 김정일을 비난하고 북한의 민주화운동을 주장하는 황장엽 선생에게는 거의 연금상태나 다름없는 처지로 몰아넣으면서 일체의 외부활동을 금지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황 선생은 그 동안 가고 싶은 곳을 갈 수도 없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으며, 하고 싶은 말도 할 수 없는 철창 없는 감옥생활을 강요당해 왔습니다. 


소위 노벨상을 수상한 인권 대통령이라는 이 정권 아래에서 황 선생의 기본적 인권은 철저히 짓밟혀 왔습니다. 국정원은 관리와 보호라는 미명 하에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가했던 것입니다. 지난 번 황 선생께서 미국에 가서 증언하겠다고 하자 임동원 씨는“국정원에서 나가라!”고까지 협박하면서 죽음으로 내모는 조치조차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3. 박지원의 워커힐 호텔 난동사건 


제가 임동원 씨를 결정적으로 의심하게 된 것은 퇴사할 무렵 동료에게서 전해들은 에피소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000년 9월, 북한의 김용순이 전격 서울을 방문했을 때 워커힐 호텔에서 환영만찬이 벌어졌습니다. 그 자리에는 박지원 문화부 장관도 초청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찬이 끝나갈 즈음, 만취(滿醉)한 박지원 씨가 갑자기 난동을 부려 행사장이 난장판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거의 인사불성인 상태에서“국정원 내에 빨갱이 새끼가 두 놈 있다. 너희들은 정권이 바뀌면 청문회에 서게 될꺼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박지원이 말한‘빨갱이 새끼 둘’이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임동원 씨와 김보현 씨를 지칭한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난리를 친 이유는 남북정상회담 협상 과정에서 얼굴마담 노릇을 하면서 임동원 씨와 김보현 씨의 언동에서 간첩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지원 씨 난동사건의 배경에 대해 제 나름대로 좀 더 부연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당시 박지원 씨는 한빛은행 대출비리 사건으로 코너에 몰려 있었고, 실제로 워커힐 사건이 있은 지 약 10일 후에 문화부 장관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미 국정원에서는“민심 수습을 위해 박지원을 잘라야 한다”고 청와대에 보고했습니다. 박지원 씨는 이러한 동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임동원 원장에 대해 감정이 극히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박지원 씨의 입장에서는‘임동원이 나에게 칼을 겨누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박지원 씨를 비롯한 동교동계와 임동원 씨는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 후 임동원 씨의 정치적 위상이 올라가자 동교동쪽에서는 2000년 8월경 의약분업 실패 등을 이유로 대면서“국내 정보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정원장을 동교동계 핵심 측근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이즈음 실제로 임동원이 통일부 장관으로 되돌아가고 국정원 직원 30여 명이 통일부로 옮기는 방안이 논의됐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이 직접“남북정상회담의 후속 조치가 더욱 중요하다”고 교통정리를 하는 바람에 이 문제는 유야무야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후속 조치란 것이 북쪽으로 뇌물 잔금을 보내는 작업이었던 것입니다.


임동원 씨와 동교동과의 관계를 시사하는 또 다른 에피소드도 소개 하겠습니다. 


1999년 12월 임동원 씨가 국정원장으로 부임했을 때, 당시 원장 비서실장이던 최기O 씨(정규 10기, 전주고)에게“여기는 왜 전라도 사람밖에 없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기조실에서는 부랴부랴 이영O 강원지부장을 비서실장으로 불러 올렸습니다. 


이야기가 좀 벗어납니다만, 이영O라는 분은 강원도 출신으로 국내 부서에서 경제분석에만 전념한 책상물림이어서 비서실장 자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영O 실장은 2001년 4월 신건 원장이 취임한 후에는 감찰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자리 역시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박지원 씨를 비롯한 동교동계와 임동원 씨는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 다 허물어져가는 이 정권의 권력의 주축을 떠받치고 있는 이 두 사람이 서로 말이나 주고받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쨌거나 그날 워커힐 호텔에서 박지원 씨가 벌였던 해프닝은 불문에 붙여졌습니다. 내가 짐작하기로는, 이 사건은 청와대에도 보고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일은 우리 직원들끼리만 쉬쉬하는 문제가 되었습니다만, 저는 이 일로 인해 임동원 씨를 본격적으로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4. 임동원 씨에 대한 수사국의 내사 동향

 

퇴사 후 저는 우연히 수사국 선배에게서“임동원은 간첩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선배의 말에 의하면, 자기가 잘 아는 수사국의 어느 동료 직원이 오랫동안 임동원을 내사해 왔는데, 99년 12월 임동원이 갑자기 원장으로 부임해 오자, 담당 과장과 상의한 후 보관하고 있던 파일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몸을 피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저는 그 수사국 직원 이름이 하세O이며, 부산 출신으로, 86년경 수사 기본과정으로 입사했고, 현재는 사무관(5급)이며, 실제로 99년 12월 말 본부에서 경기지부로 전근한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본부에 근무하는 수사국 사무관 직원이 이유 없이 지방으로 전출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왜냐하면, 수사국의 경우 지방에서는 서기관 진급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세O 씨를 만나 임동원 씨에 대한 내사 자료의 존재 여부와 내사 시기, 내사 진행 정도, 소환조사를 하지 않은 이유 등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설사 그가 개인적으로 자료를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나같은 후배에게 극비에 속하는 보안사항을 털어 놓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하세O 씨가 임동원 씨를 내사해 왔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직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임동원 씨의 내사 동향에 대해 더 이상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임동원 씨의 간첩 의혹을 더욱 깊이 가지게 되었고, 혼자서라도 이 일을 파헤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5. 임동원과 북풍사건

 

그 후 저는 공개된 자료를 찾아보면서 임동원 씨의 행적에 대해 조사해 보았습니다. 저는 우연히 1998년 월간『신동아』에 실린 권영해 전 부장의 공소장에서 임동원 씨의 대북 접촉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권영해 부장은 1998년 소위「북풍(北風)사건」의 법정 진술에서“임동원은 아태재단 사무총장 신분으로, 95년 10월경부터 중국의 장성호텔 등지에서 안병수 등 북측 아태위 인사들을 수차례 접촉해 왔다”고 진술했습니다. 저는 이 공소장을 보면서, 이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1998년 4월 소위「북풍사건」이란 것을 일으켜서 한나라당을 처 죽일 듯이 난리를 치다가‘왜 갑자기 덮어 버렸는지?’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당시 권영해 부장 등 관련 피고인들의 입에서 임동원 씨의 간첩행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나오자 청와대에서 이 문제를 더 이상 파고드는 것이 이롭지 못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검찰에“사건을 덮어라”고 지시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제가 듣기로는, 당시 수사 검사들은 안기부의 공작파일 등 핵심 증거자료는 참조하지 못하고 외부자료 없이 오로지 관련 인사들의 증언에만 의존했다고 합니다. 당시 수사검사들은“솔직히 우리도 대북관련 문제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고 토로했다고 하며, 그래서 대북관련 사항은 덮어두고 선거법 위반 등으로 기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북풍사건」에 대해 제가 국정원에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당시 대북공작국에서는 임동원 씨의 대북접촉 첩보를 여러 차례 입수했다고 합니다.「북풍사건」의 공판정에서 권영해 부장이 북한의 간첩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던 허동웅이라는 자의 입에서도“임동원이 북한 쪽을 돕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진술이 수차례 있었다고 합니다. 


대북공작국은 97년 초 임동원 씨에 대한 이러한 혐의점을 정리하여 수사국으로 관련 자료를 이첩했다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 수사국에 근무하는 모 전라도 출신 직원이 이러한 동향을 민주당으로 유출시켰다고 합니다. 소위「북풍사건」을 둘러싸고 안기부와 민주당 간의 정보 전쟁은 이미 97년 초부터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민주당에서는 천용택과 정동영이 이 정보전쟁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의 짐작으로는, 수사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체적으로 임동원 씨의 간첩 혐의에 대해 내사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대북공작국으로부터 임동원 씨에 대한 공작 자료를 이첩 받았을 것입니다. 권영해 부장은 수사국과 대북조사국으로부터 이러한 정보를 보고받아 임동원 씨의 간첩활동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권영해 부장이 소위「북풍사건」이란 것에 휘말렸던 것도 자기 나름대로는 확신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처럼 선거 직전에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 권영해 부장이 조기에 석방된 것도 석연치 않은 점입니다. 사실 저는 그 후 권영해 부장과 김대중 간에 엄청난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들은 적은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라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6. 임동원씨의 의심스런 여러 가지 행적들

 

사실 이 정권이 들어서기 전, 임동원 씨의 역할이 이렇게까지 막중하게 되리라고 짐작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 정권에서 대북정책에 관한 한 임동원 씨는 과히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에서 시작하여 통일부 장관, 국정원장, 다시 통일부 장관, 그리고 탄핵을 받고서도 다시 외교안보통일특보로 청와대로 재입성하는 저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안보 관련 수장을 완전히 한 바퀴 사이클링한 것입니다. 


그는 통일부 장관으로 되돌아간 후에도 국정원의 대북 부서를 마치 제 부하 다루듯이 취급했습니다. 그 힘의 원천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대통령 및 북한과의‘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황장엽 선생도 김대중과 임동원을“북한과 깊숙이 결탁한 관계”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정권 초기, 이종찬 원장과 라종일 차장은 햇볕정책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시각을 보임으로써 임동원 씨와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못 가서 안보라인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을 제거하고 난 후 임동원 씨는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이른바 햇볕정책이라는 허울 아래, 가히 굴욕적이라고 할 대북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습니다. 박재규, 홍순영, 정세현 등 역대 통일부 장관들뿐만 아니라 모든 안보 관련 수장(首長)들을 자기 사람으로 임명하면서 절대적인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2000년 4월, 엄익준 차장이 죽기 직전에 임동원 씨는 엄 차장의 손을 잡으며“이 다음에 장관으로 천거하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장관 자리 하나 정도는 언제든지 임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정권 초기, 대북 첩보 수집부서에서는“남북관계가 잘 풀리려면 임동원이 책임 있는 자리에 나서야 한다”는 북한 쪽의 첩보가 수시로 입수되었습니다. 북한이 남쪽과 대화할 때 남쪽 대표가 북한 출신이기를 선호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아주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사전에 북한과 입을 맞추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임동원 씨가 간첩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잠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 임동원 씨의 옛날 행적을 몇 가지만 더 더듬어 보겠습니다. 임동원 씨는 91년 남북합의서 체결 시에 우리 측 실무대표로 북한을 십여 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북한 측에서 그에게 누이와의 만남을 몰래 주선해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때부터 임동원 씨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임동원 씨와 북한 간에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 후 임동원 씨가 이른바 훈령조작 사건을 언론에 흘려서 대북 강경론자인 이동복 특보를 낙마시켜버린 사건은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입니다. 


94년 초, 임동원 씨는 김대중이 설립한 아태재단(亞太財團)의 제2대 사무총장으로 앉았습니다. 북한의 김용순은 94년 7월, 마치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라는 것을 발족하고 공개적으로 아태재단과의 교류를 요청하였습니다. 


저는 북한이 이러한 용어를 선택한 점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이때만 하더라도 북한은 주체사상을 주장하던 시절로‘아시아태평양’이라는 용어는 그들에게는 생경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아시아태평양’일까요? 사전에 서로 입을 맞추지 않고서는 붙이기 힘든 명칭이 아닐까요? 


임동원 씨가 아태재단의 사무총장으로서 비밀리에 북한과 접촉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임동원 씨와 김용순은 95년에서 97년까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임동원 씨와 김용순은 동갑 나이이지만 서로 개인적인 스타일은 판이합니다. 그런데도 둘 사이는 대화가 아주 잘 통합니다. 


저는 또한 임동원 씨가 북한의 대남문제를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있는 임동옥(춘길) 아태위원회 제1부위원장과도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란 의심을 짙게 가지고 있습니다. 임동옥은 임동원 씨보다 나이가 한 살 아래입니다. 저는 이 시기의 임동원 씨의 대북 커넥션을 밝히는 것이 그의 간첩혐의를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난 후 임동원 씨의 행적에는 너무나도 의심스런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는 항상 결벽증에 걸린 사람처럼 병적이라고 할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쓰면서 뭔가 숨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의 과잉 보안의식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을 자아냈습니다. 그는 부하직원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보좌관에게조차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김대중 정권 초기인 이종찬 원장 시절, 임동원 씨는 이상스럽게도 손발을 맞추어야 할 안보관련 고위인사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석연치 않은 행동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해야 할 안보 장관들이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드러내지 않는 이상한 광경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때부터 김보현 대북전략국장은 직속 상관인 라종일 차장과 이종찬 원장을 제치고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인 임동원과 직거래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명령과 복종을 중시하는 국정원의 분위기로 볼 때, 이러한 일은 아주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천용택 원장 시절인 1999년 하반기,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임동원 씨는 미국을 방문하여 페리 전 장관 등 미국측 인사들을 만나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그때에도 임동원 씨는 자신의 행적과 협의 내용을 극비에 부치고 국정원 파견관을 의도적으로 따돌렸습니다. 당시 최덕만 샌프란시스코 파견관은 임동원 씨의 방미활동을 제대로 파악해서 보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천용택 원장으로부터“당장 철수하라!”는 질책까지 받아야만 했습니다. 


임동원 씨는 당시 자신의 통역관에게“누구에게도 통역 내용을 발설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최덕만 영사는 해외공작국 북미과장 시절에 일을 너무 깐깐히, 열심히 하는 탓에 부하직원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2001년, 저는 그분이 위장암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직업병으로 돌아가셨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런 분이 동향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임동원 씨는 극비리에 행동해야만 했을까요?


2000년 초, 임동원 씨는 국정원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모든 해외 파견관들에게 대북 비선(秘線)접촉라인을 개척하라고 특별지시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 북경에 파견된 통일부 직원(통일관)이 국정원 몰래 대북 비선라인 구축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통일관은 대북 브로커인 흑민경(흑룡강성 민족경제위원회) 사장 최수진이란 자를 통해 아태위의 김완수 참사와 연계해 일을 진행했었습니다. 


이때 이러한 동향을 보고받은 임동원 씨는 필요 이상으로 격노했습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부하직원이었던 통일부 직원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도 말입니다. 임동원 씨의 그러한 과잉 반응은 도무지 의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임동원 씨가 국정원장으로 재직할 동안 가장 고통을 받았던 직원들은 단연 북한국(北韓局) 분석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북한국 동료들로부터“도대체 원장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푸념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북한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보고서를 올려도, 북한에게 조금만 불리한 내용이면, 어김없이 질책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임 원장이 재직하는 동안에는 북한국의 분석관들은 제대로 된 보고서를 전혀 생산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7. 임동원의 대북 커넥션


저의 견해로는, 2001년 3월에서 8월까지가 임동원 씨와 북한과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의미있는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2001년 3월 초,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이 한반도 팀을 꾸리기도 전에 성급하게 준비도 안 된(?) 미국을 방문함으로써 처참한 외교적 실패를 안고 돌아왔습니다. 뒤에 알려진 바를 참고해 볼 때, 김대중 대통령은 이때 김정일의 5월 남한 방문과 평화선언 문제 등에 대해 미국의 양해를 구하려고 무리하게 방미를 추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점은,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가 실패하고 있는 것을 본 북한은 즉시 계획되었던‘장관급 회담을 무기한 연기한다’는 통보를 발표했다는 점과, 3월 27일 임동원 씨가 국정원장에서 밀려나자마자 이틀 후인 3월 29일 모든 남북관계를 일방적으로 중단시킨 점입니다. 


그해 3월 중순 방북했던 김한길 문화부 장관과 오사카 탁구 단일팀 구성에 합의했던 북한이, 임동원 씨가 국정원장직에서 경질되자마자 일체의 남북접촉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던 것입니다. 중앙일보 최원기 기자의 보도에 의하면, 이 시기에 북한에서도 김용순이 체포되는 등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저는 이 시기에 남북 간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숨 가쁘게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임동원 씨가 사태의 중심에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후에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2001년 3월 말 임동원 씨는 이임하면서 당시 대북전략국 김만O 1단장에게 남북정상회담 녹음테이프를 파기하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김만O 단장은 자신의 부하직원인 박모 과장, 윤모 팀장 등에게 자료파기를 지시했으나, 이들이“책임질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당시에는 이를 파기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테이프들이 아직도 존재하는지, 아니면 결국 파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저는 이 테이프를 직접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전략1과에 잠시 근무하는 동안 정상회담 녹취록은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 녹취록은 1급 비밀로 분류되어 5~6부 정도 발간되어 청와대 등에 배포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녹취록은 테이프의 내용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거나 저는 이렇게 중요한 자료를 서둘러 파기하려고 한 임동원 씨의 저의가 아주 궁금합니다. 


남북정상회담의 내용에 관해서는 그동안 언론에 간헐적으로 흘러나온 것도 있고 보안을 요하는 사안이기도 하여, 제가 길게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상회담이라면 당연히 남북의 정상인 김대중과 김정일이 모든 사항을 직접 논의해야 옳을 것인데, 녹취록의 많은 부분은 임동원 씨의 발언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남북정상 간에 허심탄회한 의견교환은 보이지 않고, 마치 임동원 씨가 남북 양쪽의 중개인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걸까요? 


2001년 4월, 김대중은 신임 신건 국정원장에게“북한이 남북관계를 전면 중단한 이유를 분석 보고하라”고 지시, 대북전략국의 안태원 종합과장이 중심이 되어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안 과장은 국정원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부이사관으로 승진한 유능한 사람이었는데, 그즈음 미국대사관 직원에게 보안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어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김대중은 그 당시 북한이 남북관계를 단절한 이유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국정원에 그런 지시를 내린 것으로 짐작됩니다. 


김대중은‘김정일이 이미 받을 것 다 받아 챙기고 이제 아쉬울 것이 없는 상태’라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김대중은 자신이 방미하여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돌파구를 마련해 주지 못한 데 대해 김정일이 실망하고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국정원의 대북 관련 직원들만 감쪽같이 속아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히 김대중의‘악마적 통치술’이 발현된 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임동원 씨가 통일부 장관으로 되돌아간 2001년 4월 이후, 남북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중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때부터 몇 달간 임동원 씨의 북한에 대한 자세가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전에 출연해서는 대북 전력지원이 불가능한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기도 하는 등, 그 전의 일방적인‘퍼주기’와는 상당히 다른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2001년 5월, 김정남의 일본 밀입국 체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지난 번 편지에서‘이때 김정남이 일본에서 김한정을 만나기로 약속했을 것’으로 짐작한다고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


2001년 6월, 김정일은 북한 상선이 우리 영해와 제주해협을 통과하도록 지시하여 의도적으로 한반도의 저강도 긴장을 유발하였습니다. 아마도 김정일은 우리 정부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해군이, 어떻게 대응해 나오는지 떠보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저의 판단으로는, 이 시기 임동원 씨는 북한의 파트너인 김용순의 입지를 강화해 주려고 딴지를 걸고 있었고, 김정일은 임동원 씨의 입지와 태도를 시험해 보려고 의도적으로 도발을 감행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쉽게 풀어서 설명드리자면, 간첩과 간첩을 부리는 자 간의 의사전달이 이런 식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2001년 8월, 8 ‧ 15 방북대표단 문제에도 임동원 씨는 예상 외로 대표단 파견을 반대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그 말썽 많았던 대표단 파견은 김대중이 북측의 전화를 받고나서 직접 결정하여 임동원 장관에게 지시한 것입니다. 


2001년 8월 14일, 아침까지만 해도 대표단 파견에 대해 아무런 조치가 없다가 임동원 씨가 오전에 청와대에 들어가서 직접 지시를 받은 후 대표단을 구성한 것입니다. 8월 14일 오후에 부랴부랴 대표단을 구성하다 보니 온갖‘오사리잡놈’이 다 끼인 대표단이 구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방북 시의 행동요령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시행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급조된 대표단이 북한에 가서 벌인 행각은 아직도 국민 여러분이 잘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한 가지 지적하고자 하는 중요한 점은, 대표단 파견 과정에서 당시 북한쪽 일꾼들 사이에서는“이제 임동원이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라는 말들이 오갔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 말을 뒤집어 보면, 그 이전까지는, 또는 그 이후에는, 임동원을 믿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이겠지요.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8. 맺음말

 

국민 여러분, 이상으로 제가 임동원 씨를 간첩이라고 의심하게 된 이유들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저는 아무런 직접적인 증거 없이 저의 주관적인 판단을 공개하는 데 많은 부담을 느끼면서 이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우리나라의 안보와 직결되는 사안인지라 무리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글을 발표하게 되었음을 국민 여러분께서 이해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아마도 국가안보를 책임져야 할 국정원의 수장(首長)이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저의 주장이 너무나 황당하게 들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정권에서는 이러한 엽기적인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지난 번 저의 편지에서도 확인하셨을 줄 압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아마도 그동안 김정일이 우리를 그렇게‘우습게 보고 깔본 이유’를 짐작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안보상황에 대해 대단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마치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누란(累卵)의 형국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김정일은“미군만 없으면 3일이면 남한 전체를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는데, 대다수의 우리 국민은 안보불감증에 빠져 있습니다. 김정일은“통일은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너스레를 떨고 있는데, 우리 국민은 안보 거부감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어떤 놈들이 이런 상황을 초래했을까요? 


저는 임동원 씨가 서독의 빌리브란트 수상의 개인 수행비서였던 귄터 기욤이나, 지난해에 죽었다는 베트남의 부응옥 냐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임동원 씨의 위치와 역할로 볼 때 그들보다도 훨씬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것으로 봅니다. 


며칠 전에 임동원 씨는“햇볕정책의 모든 업적은 대통령에게 돌리고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도 그가 자신이‘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의심스럽습니다. 

 

저는 김대중의 간첩혐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정권의 권력 핵심에는 크고 작은 간첩들이 너무나도 많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최근 이 정권의 최고 핵심 실세의 할아버지가 해방 직후 빨갱이로 활동하면서 자금조달을 위해 위조지폐를 제조하다가 검거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또한 이 정권 내내 모든 경제정책을 책임졌던 한 핵심인사의 형이 북한에서 고위층으로 있으며, 오래 전부터 김대중과 활발히 연계하고 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정보를 검증하지는 못했지만, 정황으로 보아 근거 없는 말은 아닐 것으로 믿습니다. 심히 우려스럽고 개탄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몇 해 전에 국군기무사의 모 간부가 청와대 모 인사의 간첩혐의를 조사하다가 강제로 전역 조치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국정원 수사국의 모 직원도 청와대 모 인사의 간첩혐의에 대해 수사계획을 작성해 올렸지만, 부서 상관으로부터“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나?” 하는 질책을 받고 사건을 덮었다고 합니다. 


이 정권에서 간첩이 검거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간첩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아니 득시글거립니다. 문제는, 간첩 떼거리들이 권력을 잡고 있기 때문에 못 잡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간첩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다시 한 번 호소합니다. 


조국의 안보가 극히 위태롭습니다. 저는 2000년 7월 월간조선에 실린, 이대용 공사가 쓴‘월남 적화 과정과 요즈음 한국사회’라는 글을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글에는 우리와 일란성 쌍둥이라 불리는 월남이 어떻게 패망하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글의 내용이 진실하다고 믿습니다. 저는 언젠가“수사국의 간부들도 그 글을 회람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아직도 영 희망이 없는 건 아니구나’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 말, 북한의 땅굴을 찾아내기 위해 힘쓰던 어느 애국자가 수원 부근에 있는 땅굴 현장에서 과로로 숨졌다고 합니다. 땅굴을 찾아내야 할 국방부와 국정원은 오히려 갖은 방법으로 민간 땅굴 탐사자들을 방해하고 박해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남침용 땅굴을 발견하고자 하는 분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저들의 방해로 인해 접속조차 안 되고 있습니다.어찌하여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 깨어나야 합니다. 자유는 공기나 물처럼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애국시민의 피를 먹고 자랍니다. 지키려는 의지가 있는 국민만이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저의 이 외침이 부질없는 메아리로 그칠 때, 우리 조국의 운명은 보장될 수 없을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들의 현명하신 판단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2003년 2월 14일 


전 국정원 직원 김기삼 드림




*추신: 사랑하는 국정원 동료 여러분!


저는 오늘 지난 번‘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악마적 초상을 공개한 데 이어, 우리가 원장으로 모셨던 임동원 씨의 가증스러운 초상을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아마도 저를 조직에 누를 끼치는 철없는 배신자라고 생각하실 분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퇴사한 후에도 국정원 직원이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습니다. 저는 지금도 조직을 지키고 싶고, 조직이 바로 서는 모습을 보고 싶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내용만 공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심정을 이해해 주시기를 감히 요청드립니다.


존경하는 국정원 동료 여러분!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들 사이에서는“조국의 안보를 조선일보에 맡기고 있다”는 자조적인 말들이 오갔습니다. 조국의 안보니 통일이니 하는 거창한 구호는 남의 이야기인 양 치부하고‘월급봉투와 월초 수당에 목을 매는 초라한 월급쟁이의 쪼들린 삶’을 살아온 우리들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대의(大義)에 목숨을 거는 자랑스러운 국정원 직원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조국의 운명을 책임지는 당당한 자세를 지닌 국정원 직원의 모습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기를 소원합니다. 저를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겸손한 국정원 직원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저의 행동이 어떤 말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길을 갈 것이며, 저의 결심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