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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 프로젝트(연재중)/13. 장춘에서 오슬로까지

13. 장춘에서 오슬로까지

1997 10, 전대미문의 폭풍이 대한민국을 덮쳤다. 아시아를 휩쓴 사상 초유의 외한위기가 전국을 강타한 것이다. 나라가 부도 직전에 몰렸다. 기업은 줄도산하고 수많은 실직자들이 거리에 나앉았다. 세계화니 국제화니 하고 떠들면서 요란스레 OECD 가입 축하 샴페인을 터뜨린 지가 엊그제인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냈다. 국민들은 외환보유고를 조금이라도 채워 보려고 장롱 속 금붙이들을 꺼냈지만, 대한민국은 결국 580억불의 긴급 구제금융을 받고 IMF의 간섭을 받는 처지가 됐다.  

양세훈 호놀룰루 총영사가 노르웨이  대사로 전근 발령을 받았던 것은 IMF 위기가 터진 직후였다. 권영민 대사의 후임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지상천국과 같은 하와이에서 3년을 보내고, 춥고 음울한 오슬로로 떠나는 그의 걸음은 무거울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오슬로에 도착하는 그날부터 본국의 경제위기에 대처하느라 동분서주 쫒아다녔다.

그의 전임자처럼 그도 퇴임 후 회고록을 냈다. 책은 2005년에 나왔다. “장춘에서 오슬로까지”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소설 형식을 빌고 있지만, 내용으로 볼 때 자서선의 성격을 띄고 있다. 그의 드라마틱한 외교관 일생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수작이다. 특히 서울 올림픽 준비, 중국민항기 사건, 한중수교 등 역사의 현장 뒤안길의 자잔한 일화들은 책의 재미를 더해 준다. 이책은 일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오히려 큰 호평을 받기도 했다.  

책을 출판한 후 그는 일요서울의 윤지환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앞부분은 윤 기자의 ▲ 이후 부분이 양 대사의 설명이다. 

『 - ‘장춘에서 오슬로까지’를 최근에서야 읽어 봤습니다. 책을 쓰게 된 이유라도 있는지요. ▲ 거창한 이유는 없고 그냥 집안의 기록으로서 내 삶을 남기고 싶었어요. 또 사람들에겐 외교관의 삶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었고요. 그게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 책이 저의 경험을 사실 그대로 엮은 책임에도 소설이라고 한 이유는 이 속에 다소 민감한 사안이 될 수도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교라는 것이 아무래도 정치와 가깝기 때문에 책 내용을 100% 사실 그대로라고 했을 때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어 소설이라고 했습니다. 

- 책의 끝부분에 나오는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 평화상 이야기에 눈길이 갑니다. ▲ 제 생각에도 아마 정치에 관심 있는 분들은 그 이야기를 눈여겨보실 것 같습니다. 책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저는 노르웨이 대사로 근무하면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유력 후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자 마음먹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비자금을 조성해 뇌물을 주거나 로비를 했다는 게 아니고, 그저 한 나라의 대사로서 우리나라 대통령을 잘 봐달라고 선전하고 다닌 정도입니다. 조국의 명예를 높이려 했을 뿐이지요.[1]

그가 말한 "다소 민감한 사안이 될 수도 있는 내용"은 두 말한 필요도 없이 노벨평화상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 제 6부는 노벨평화상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오슬로에서 주 노르웨이 대사로 근무하면서 김대중에게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 그가 펼쳤던 여러가지 노력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읽어 보면 이 책이 역사의 증언으로서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에 대한 그의 감회부터 들어 보는 게 좋겠다.

『나는 텔레비젼을 통해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을 듣게 되었다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TV 화면에는 기쁨에 찬 얼굴이 계속 비쳐졌다나는 북한의 김정일을 만나기 위해 대통령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다만세간의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대통령이 추진한 남북정상회담 실현이 노벨상 수상에 결정적 역할에 부응했다고 생각했다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나는 북한의 김정일을 만나기 위해 대통령이 어떤 댓가를 치루었다는 항간의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남북정상회담 실현 자체가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했다. [2]

이 짧은 감회에서 "남북정상회담 실현 자체가 노벨상 수상의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두 번이나 말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아래에서는, 양세훈 대사가 노벨평화상과 인연을 맺게 된 과정을 책에서 몇 부분 발췌해 소개해 본다. 먼저, 인용이 조금 길어진 점에 대해 사전에 양해를 구한다. 양세훈 대사의 증언이 가지는 무게가 그만큼 커기 때문에, 가능한 필자의 해석이나 설명 없이 양 대사의 직접적인 증언을 전하고자 한다.

『올림픽 조직위 시절부터 형제처럼 지내온 왕동운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자기 회사 부사장의 누이가 새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 중의 한 명인 이우정 여사라며, 공식적으로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라도 연락하라고 말했다.[3]

『부임 인사차 노벨평화상위원회 위원장과 사무국장을 예방한 자리에서 오래 전부터 김대중이 매년 노벨상의 유력한 후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4]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서는 인권 투쟁만으로는 부족하고, 남북관계에 결정적 물꼬를 터야한다고 간파하였다…… 당시 노르웨이에서는 정부 부처뿐만 아니라 국회, 언론계, 학계 어디를 가나 김대중에 대한 호의는 대단했다. 노벨위원회 회원들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그에 대해 호의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5]

『김대중 신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유리한 환경 조성을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문서로 작성해서 왕 사장에게 보냈다. 특히 남북관계의 돌파구 마련이 관건임을 기술했다. 왕 사장이 내가 보낸 문서를 측근에게 건넸다는 연락이 왔다.[6]

이러한 노력과 함께, 양세훈 대사는 새 대통령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력을 문서화 하여 노르웨이 각계와 노벨위원회에 보냈다. 물론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생애를 기록한 문서를 첨부하여 보내주기도 했다. 그는 또한 텔레비젼의 시사 프로에 출연해 한국 경제위기의 상황과 새 대통령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모두가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염두에 두고 발로 뛴 것이었다. 그해 1997년 노벨평화상 수상식에 다녀온 후, 양 대사는 직원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오늘 수상식에 가보니 그 많은 그간의 수상자 중에서 한국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기와서 파악한 것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으로 노벨상에 접근해 있는 사람은 대통령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대통령과 이념을 달리하고, 그 분의 대북정책을 지지하지 않지만 저는 그래도 이 분이 노벨상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사람이 받는다면 나라의 영광이요 민족의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 있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니 여러분들도 그렇게 제 뜻을 알아 주시기 바랍니다.[7]

해가 바뀌고 1998 1, 양 대사는 서울에서 열리는 연례 공관장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김중권 비서실장과 마주쳤다. 당시 상황을 전하는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가슴에 단 명찰을 본 그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참 중요한 곳에 계십니다.” 라고 인사를 건네왔다. 만찬장에 입장하기 전 대통령은 공관장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는데 무척 피곤한 기색이었다. 거의 졸리는 눈을 감은 채 한 사람 한 사람 악수를 하던 대통령은 나의 이름이 호명되자 순간 눈을 떠고 나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8]

감기는 눈을 번쩍 뜨면서, 자신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양 대사를 바라보는 늙은 대통령의 눈빛이 어떠했을런지 짐작이 간다. 그 후에 벌어진 일도 따라가 보자.  

『공관장 회의를 마치고 자유시간 중에 양 대사는 왕 사장의 안내로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이우정 여사를 만났다. 이 여사는 “지난번 보내 주신 문서는 대통령게 직접 드렸습니다. 자세히 읽어 내려 가시다가 가끔 고개를 끄덕이시더군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얼마전 외무장관과 한 차를 타고 가다가 잠깐 그것에 대한 말을 했더니, 장관이 대사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9]

양 대사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을 알았다. 현지 대사가 본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청와대에 보고를 했으니 외무부 본부로서는 당연히 불괘했을 법했다. 얼마 후 선준영 외무차관을 만나 보니 그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선 차관은 문서를 들여다 보더니, 『“여기 보면 노벨위원을 방한 초청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들이 한국에 오겠습니까? 현실성 없는 방안은 만들지도 마세요.”』라면서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10]

 외교부 본부로부터는 핀찬을 들었기 때문에 기분은 썩 좋지 않았겠지만, 그는 노르웨이에 돌아간 후에도 노벨상 활동을 계속했다. 노르웨이의 각계에 김대중 대통령을 알리는 작업을 더욱 열심히 했다.

『방송국 사장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한 시간짜리로 북한 이야기도 곁들여 인터뷰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한 시간 동안 그가 물어 오는 북한 이야기와 우리 대통령 이야기를 하면서 인터뷰를 계속했다. 그는 방송이 끝날 때쯤, 한국 대통령에 대한 각별한 호감을 표했다.[11]

하지만, 한 번 꼬이기 시작한 일은 그 후 계속 꼬이기만 했다. 한 번은 박태영 상공장관이 투자 유치단을 이끌고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그는 현지 대사로서 장관의 투자유치 활동을 적극 협조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과 장관의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박 장관과 관계가 냉랭해져 버렸다.

『박 장관은 귀국 후 청와대에 보고를 올릴 때, 나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전했다. 본부로부터 현지 대사가 투자 유치에 별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는 데에 대한 해명을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12]

그 후에도 양 대사의 불운은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는 아태 민주지도자회의 사무총장이 노르웨이를 현지 방문했다.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김상우 의원이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나는 그에게 현재 노르웨이 속 한국의 현황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노벨위원회를 방문하고 국회의원들을 만나고 귀국했다. 공항에서 나를 향해 웃는 그를 배웅하고 돌아 왔는데, 어떻게 된일인지 그 역시나 나를 좋지 않게 보고했다는 전갈을, 왕 사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13]

이런 와중에 DJ의 처조카가 오슬로에 왔다. 이영작 박사였다. 이 즈음 그는 최규선과 함께 DJ의 노벨상을 추진한다며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고 있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그의 이러한 행적은 1998 2월 일요서울에 크게 나는 바람에 DJ를 크게 당혹케 한 적이 있었다. 그로인해 그는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났다. 충성 경쟁을 위한 마지막 발악을 벌여야 했다. 양 대사에게는 엎친 데 덮친 손님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문서를 달라고 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어 그에게 문서를 주었다. 반신반의 하는 중에 왕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 인척에게는 문서 같은 것을 주면 않된다는 것이 이우정 여사를 전언이라고 했다.[14]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대사관에 같이 근무하던 박노용 국정원 파견관은 양 대사의 노고를 높이 사 주었다. 그는 양 대사와 김한정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잘 해 주었다. 국정원 본부로부터는 좋은 소식이 왔다.

『정보 파견관이 서울에 나의 텔레비젼 인터뷰를 수록한 비디오와 그간의 활동상황을 보고했는지, 이종찬 부장으로부터 격려 편지가 배달되었다.』『정보 파견관은 서울에서 대통령의 또다른 측근 김한정이 온다고 내게 알려 왔다.[15]

양 대사를 만난 김한정은, 『 “만드신 문서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환경 조성에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앞으로 같이 일해 보십시다. 한 번 와서 대사님도 뵙고, 현지 사정도 직접 들어 보려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대사님이 여기 오래 계시도록 건의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16]

후에 김한정의 이러한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때까지만해도 김한정이 그러한 약속을 지킬만한 권력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양 대사의 외교관 말년은 순탄치 못하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



[1] 일요서울, 2008.10.14., "노벨상 비화 간직한 양세훈 전 노르웨이 대사"

[2] 양세훈, "장춘에서 오슬로까지"

[3] Ibid.

[4] Ibid.

[5] Ibid.

[6] Ibid.

[7] Ibid.

[8] Ibid.

[9] Ibid.

[10] Ibid.

[11] Ibid.

[12] Ibid.

[13] Ibid.

[14] Ibid.

[15] Ibid.

[16]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