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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 프로젝트(연재중)/11. 비운의 망명객 1

11. 비운의 망명객 1

          평소 그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그의 얼굴은 희노애락의 감정이 모두 다 떠나 버린 사람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인간적인 감정이란 게 그에게는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망명함으로써 가족과 친지, 부하 등 수십명이 죽음으로 내몰렸을터이니 그 죄책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그의 얼굴에서 생기가 돌 때가 있었다. 바로 조국의 통일을 역설할 때가 그랬다. 그럴 때면 그의 얼굴에는 격렬한 감정의 파도가 피어오르곤 했다. 그의 설명이 김정일 정권에 대한 비판에 이르면 목소리의 톤이 달라지곤 했다.

          『나는 오랫동안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 살아왔다. 처음에 나는 그 허위와 기만이 근로인민대중의 해방을 위하여, 즉 착취계급과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에 그것이 독재자의 이기주의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재자의 이기주의는 수령의 개인숭배 사상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 북한은 계급주의와 수령의 개인숭배가 가장 심한 나라이다. 나는 그런 북한통치체제의 중추부에서 독재자에게 아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허위선전에 동원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 김정일 체제에 복무하면서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바로 허위와 기만의 도구로 내가 이용되고 있다는 자각이었다.』[1]

          1997 2 12, 그는 북경주재 대한민국대사관으로 망명을 신청했다. 그는 총영사와 마주앉아 망명에 대한 이유를 담담하게 밝혔다.

          『나는 50여 년간 조선노동당원으로서 성실히 일해 왔다. 뿐만 아니라 조선노동당과 그 영도자의 깊은 사랑과 배려를 받아왔다. 이런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게 된 것을 내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내가 미쳤다고 평가할지 모른다. 나 자신도 내가 미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왜 나를 미치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민족이 분열되어 반세기가 지났지만 조국을 통일한다고 떠들면서도 서로 적대시하고 있으며, 북은 남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떠벌이고 있다. 이들을 어떻게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2]

          『또 노동자와 농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이상사회를 건설해 놓았다고 선전하는 사람들도 제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결국 우리 민족을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좀더 넓은 범위에서 협의할 생각으로 북을 떠나 남쪽 동포들과 협의해 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내 운명에 대해서는 시대의 흐름에 맡기고 내 행동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겸허히 맡기려고 한다. 나의 두고 온 가족들은 내가 오늘부터 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해주기 바란다. 나는 가능하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하여 미력한 힘이나마 기여하고 싶다.』[3]

          그는 냉전의 종식과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목격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평생 자신이 실현하려고 애썼던 철학적 가치관과 정체성의 몰락이 동시에 밀려든 느낌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북한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중국식의 개혁, 개방정책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북한의 현실은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가 북한체제를 ‘실속있게’ 꾸려나가지 못하고 단지 개인 우상화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들은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식대로 살아가자’며 더욱 폐쇄 정책을 고집했다.

          『오늘 북한이 겪고 있는 경제적 위기는 외국의 봉쇄정책도 아니고 자연재해도 아니며, 그것이 전적으로 김정일의 중세기적인 개인독재가 빚어낸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4]

          1994 7, 김일성이 사망하고 나서 그는 내심 북한 체제의 변화를 기대했다. 김정일만 해도 바깥세상의 흐름을 이해하는 편이라고 생각했고 나름대로 김일성 세대의 생각과는 다를 것이라는 게 자신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사망 이후에 오히려 김정일은 미국과의 핵협상에서 ‘벼랑끝 전술’을 사용하면서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켰다. 인민의 위대한 영도자 김일성이 사망한 바로 그해에 시작된 북한의 식량난은 이듬해인 1995년에 들어와 더욱 심각해졌다. 북한 전역에서 굶어죽은 사람들이 날만 새면 무더기로 나왔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살인, 강도 등 심각한 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북한사회 전체가 아비규환의 지옥 구덩이가 되었다.

          『작년 11월에, 사태가 너무 걱정되어 이와 관련한 통계를 장악하고 있는 책임자에게 지금 굶어죽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는 “1995년도에 당원 5만명을 포함하여 약 50만명이 굶어죽었는데, 1996년에는 약 100만명이 굶어죽을 것이 예견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만일 외부로부터 원조가 없는 경우 1997년에는 200만명이 굶어죽을 것이라고 하였다.』[5]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김정일과 그를 둘러싼 권력은  식량난을 해결하려는데 노력을 기울이기는커녕,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궁전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김정일의 우상화를 위한 작업에 더 치중했다‘북한에 심각한 식량위기가 닥쳤을 때 김정일이 제 애비 김일성의 묘지가 있는 궁전을 꾸미는데 드는 비용을 조금만 절약해서 식량을 구하는데 쓰기만 했어도 그토록 많은 불쌍한 인민들이 굶어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한평생 북한 사회주의 체제를 위해 애썼지만,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났다고 생각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더욱 괴로운 사실은, 자기가 평생 연구한 주제인 주체철학이 사유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는 일이었다. 수령절대주와 악마적으로 결합한 주체사상이 점차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레닌은 크레믈린궁전에서 일하였으며 그의 묘는 궁전 옆의 조그만 건물에 안치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김일성 주석은 생전에 일하던 주석궁 전체가 그의 묘지로 변하였다. 궁전을 묘지로 전환시킨 역사적 기록은 김정일 영도자님에 의하여 처음으로, 그것도 인민들이 굶어죽는 준엄한 환경 속에서 창조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이 굉장한 시신궁전을 꾸리는 데 8 9천만 달러가 들었다고 하는데, 역사상 어느 통치자가 이러한 반인민적 범죄를 저지른 일이 있었던가. 8 9천만 달러면 강냉이를 적어도 600만톤 이상 살 수 있다. 북한에 식량이 매년 200만톤씩 모자라는 것으로 보아도 600만톤이면 3년 동안은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6]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발생하면서 북한에는 위기감이 고조됐다. 당 간부들이 탄 차가 군인들에 의해 약탈당하는 일이 생기는가 하면, 시장에서 인육이 거래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문이 돌기도 했다. 원래 북한주민들이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산하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이웃의 어려운 일을 내일처럼 도와가며 화목하게 살던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 산의 바람이, 흙냄새 나는 공기가 얼마나 풋풋했었던가.

          한때 모스크바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김정일정권을 비판하며 반김정일 조직을 결성하려는 시도가 드러나 북한 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적이 있었다. 그 조직 안에는 북한을 이끌어가는 중추이자 핵심인 노동당 소속 간부 자녀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충격이 더했다. 그들 가운데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던 우수한 두뇌를 가진 제자들도 조직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희생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북한 지도부의 위기감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에게도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조차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김정일의 체제유지를 위한 노력은 절박했다. 김정일은 비밀경찰 망을 더욱 강화하고 조금이라도 반체제적인 요소가 나타나면 주동자를 색출해 공개적으로 재판도 없이 즉결 총살했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몸담아 온 북한 사회의 붕괴를 위해, 다시 말하자면 진정한 한반도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사업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까지도 바칠 생각으로 한반도의 반쪽 대한민국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망명을 요청한 5일 후인 2 17일 늦은 밤, 황장엽은 베이징의 한국 총영사관에서 북한에 남아있는 부인 앞으로 유서를 써 내려갔다. 참으로 땅을 치고 후회하고 머리를 부딪치며 용서를 구해도 회복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이 가슴을 쓰라리게 했다.

          『사랑하는 박승옥 동무에게

          내가 당신까지 속인 채 당신을 버리고 이곳에 와보니,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였고 나와 당신의 생명이 얼마나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느꼈소. 당신이 걱정하며 머리 숙이고 있는 모습이 떠오를 때면 나처럼 인정 없는 사람도 막 미칠 것 같소. 할아버지에게 욕을 먹고 자기의 자주성을 지켜 항의해보려고 복도 구석에 누워 있던 지현이, 호의를 표시하며 환심을 사려고 장난감을 가지고 막 달려오던 어린 지성이를 생각할 때마다 막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소.

          나 때문에 당신과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모진 박해 속에서 죽어 가리라고 생각하니 내 죄가 얼마나 큰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오. 나는 가장 사랑하는 당신과 아들딸들, 손주들의 사랑을 배반하였소. 나는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를 가장 가혹하게 저주해주기 바라오. 나는 나를 믿고 따르며 나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어온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배반하였소. 그들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고 욕하는 것은 응당하다고 생각하오.

          가슴만 아플 뿐 사죄할 길이 없소. 나는 이것으로 살 자격이 없고 내 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하오. 저 세상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저 세상에서라도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소. 만일 조선노동당이 지금의 비정상적인 체제를 버리고 개혁·개방을 하고 평화통일을 지향한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한다면, 비록 그것이 나를 속이기 위한 술책이라 하더라도 나는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들의 품속에서 숨을 거두고 싶소.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이별을 한 이 아픈 가슴을 이겨내며 내가 얼마나 더 목숨을 부지할지는 알 수 없으나, 여생은 오직 민족을 위하여 바칠 생각이오. 나 개인의 생명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고 가족의 생명보다는 민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며 한 민족의 생명보다는 전 인류의 생명이 더 귀중하다는 내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만 알아주기 바라오.

          사랑하는 박승옥 동무!

          당신이 이 편지를 받아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언제 목숨을 끊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유서 삼아 적어두는 것이오.

          1997 2 17, 베이징 한국총영사관에서

          황장엽』[7]

          유서를 써내려가는 동안 한 글자 한 글자가 자신에게 평생 낯선 단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글자의 생경함이 현실이라는 사실에 또 다시 가슴이 저려왔다. 그는 차라리 자신을 죽은 것으로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렇게 하면 다소라도 위안이 될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가족들이 당했을 고초를 생각하면 잠을 청해도 잠을 잘 수 없었다. 한동안 약을 먹지 않고는 눈을 붙이기조차 힘들었다. 고결한 학자의 양심과 품성을 지닌 그였기에 그와 같은 고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단의 현실 한 가운데 서 있는 그의 운명이 야속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한국에 살면서 그가 점차 느끼게 된 것은 대한민국이 자신의 순수한 동기가 실현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국정원에서 그의 강의를 청강하는 요원들의 눈에 비친 황장엽은 마치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그를 대하는 태도가 겉으로는 각별하였으나 속으로는 냉정했다. 하긴 ‘햇볕정책’이라는 허울 속에 김정일 정권과 어떻게 해서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김대중 정권에서 볼 때 황장엽은 계륵과 같은 존재했다. 김정일의 눈치를 봐야하는 정권의 심중을 잘 아는 국정원이 황장엽을 자유스럽게 놔두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것은 현실로 다가왔다. 그가 활동을 고집하고 외부에서 강의하는 횟수가 거듭되면서 그에 대한 국정원의 압박도 심해졌다. 그는 이따금씩 원장을 비롯하여 차장들에게 불려가 정부의 ‘햇볕정책’에 반하는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발언을 삼가라는 경고성 발언을 들을 때마다 아득한 나락 속으로 떨어지는 심정이었다.

 


[1] 한울, 1999,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2] Ibid.

[3] Ibid.

[4] 통일문제연구소, 1998.12., "북한의 허위와 진실," p. 10.

[5] Ibid., p. 14

[6] Ibid., p. 16.

[7] 한울, 1999,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