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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 프로젝트(연재중)/10. 국정원 외신대변인

10. 국정원 외신 대변인

          원론적인 수준에서 말하면, 정보기관은 굳이 입이 필요 없는 조직이다. 비밀이 최우선인 기관인데, 무슨 할말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정보기관에서 대변인은 불필요한 존재다. 당연히 대한민국 정보기관은 대변인 없이 지내왔다. 적어도 국민의 정부 이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갑자기 국정 홍보가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정보기관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삐딱한 신문쟁이들은 김대중 정권을 일컬어  "홍보공화국"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이는 전혀 무리한 말이 아니었다. "홍보에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오히려 곱게 불러준 것일런지도 모른다. 김대중 정부의 대언론 업무는 주로 박지원 공보수석이 맡았다. 그가 1999년에 공보업무와 노벨상 업무를 전반적으로 조율할 수 문화부 장관으로 옮겨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언론계를 타락시킨 장본인이었다. 권언유착의 표본이었다. "대한민국의 언론인치고 박지원의 촌지를 안 먹은 놈이 없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으니...   

          왜 그랬을까? 김대중 정권은 왜 그렇게 "홍보"에 목숨을 걸어야만 했을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노벨평화상 때문이었다.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 여건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국내외 언론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김대중을 어떻게 포장하여 알리느냐에 따라 노벨상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결국 홍보가 관건이었다.

          이종찬 원장은 국정원으로 문패를 바꿔 달고 나서 전면 조직개편에 착수했다. 경제/과학 정보를 수집하겠다는 둥, 해외와 대북 정보에 전념하겠다 둥, 늘상 하던 레파토리가 떠돌았다. 핵심은 국내부서의 개편이었다. 그중에서도 대언론 기능을 대폭 강화한 것이 특징이었다. 우선, 공보관제도를 신설하여 국내 언론에 대한 홍보를 전담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해외 언론을 전담하기 위해 외신 대변인 자리도 신설했다. 세꼐 정보기관 역사상 외신 대변인을 임명한 것은 아마도 김대중 정권의 대한민국 정보기관이 유일한 예였을 것이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외신 대변인의 주 업무가 노벨평화상 수상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자연히 노벨상 업무를 수행하는 대외협력보좌관실에 외신대변인이 배당되었다. 외신 대변인으로 임명된 사람은 앞서 소개한 김영준이었다. 그는 지적인 외모에다 품위가 넘치는 영국 신사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신중하면서도 여유가 넘치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브리티시 액센트의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안다는 점도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언론계에는 문외한이었다. 기자들의 세계를 전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닳고 닳은 기자들을 상대하기에, 그는 너무 순수한 사람이었다.

          외신 대변인에 임명되는 순간부터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막막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이전에 누구도 맡아본 일도 없고 시도해 본 적도 없는 일이 아니던가?' 지침이나 메뉴얼이 있을리가 없고, 딱히 조언을 얻을만한 사람도 찾기 힘들었다. 며칠간 고민한 끝에, 우선 대상 목표에 대해 현황을 파악한 연후에, 기본적인 계획부터 수립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후에는 단계적으로 계획을  수정하고 보완해 나가면서 외신과의 접촉면을 넓혀가면 될 일이었다.

          그가 상대해야 할 대상은 서울에 상주하고 있는 외국 언론매체의 특파원들이었다. 그의 최우선 임무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외신에게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햇볕정책의 취지를 알리고 홍보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냉전의 땅 한반도에 평화의 훈풍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대북 화해정책, 즉 햇볕정책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설득해야 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극도로 은밀하고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는 과제였다.

          우선 그럴듯한 논리부터 개발해야 했다. 과거 냉전 시기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이익 쟁탈의 희생양이었다. 우리는 냉전세력에 의해 원치 않는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제 국민의 정부에는 한반도에서 냉전을 종식시키고 평화통일을 가져와야 할 역사적 책무가 지워져 있다. 한반도의 평화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도 동토의 땅 한반도에서 화해무드를 지속시키고 민족의 화합을 가져와야 한다. 한반도에 평화 통일의 초석을 깔기 위해서는 대북 유화정책, 즉 햇볕정책 이외에는 대안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논리로 무장하고 그는 외신 사냥에 나섰다.        

          서울에 상주하는 외신 특파원들은 남북 대치의 긴장된 한반도 상황 속에서 끊임 없이 드라마틱한 뉴스거리를 찾고 있었다. 국정원은 외신이 갈구하고 있는 북한 뉴스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어느 정도 수준에서 북한 정보를 제공해주면 외신들을 움직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특히, 북한 문제에 대해 정보를 얻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본 언론들은 대북 정보를 가지고 요리할 수 있었다.

          외신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청와대 공보수석실이나 국정홍보처 해외홍보원에서 규칙적으로 제공해 주는 북한 관련 정보는 뉴스가 될 만한 소재는 아니었다. 설혹 정보적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그 정보는 이미 모든 언론사에게 모두 제공된 것이어서 특종으로서의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특파원들은 정부부처, 민간기업, 연구소, 학계 혹은 한국 언론사 등 마치 거미줄처럼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쏘스에서 특종이 될 만한 뉴스거리를 수배해 놓고 있었다. 이 점이 공략 포인트였다.

          그가 생각해 낸 기본 구상은 간단 명료했다. 그것은 '주고받기'였다. 원래 정보란 것은 '주고받기'   "Give and Take"가 전제되는 게임이다. 셋을 주고 일곱을 얻으면 크게 성공한 것이다. 다섯을 주고 다섯을 받아도 괜찮은 장사다. 우선 주고 나중에 받을 수만 있어도 나쁘지 않다.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이러한 기본 전략에 의거하여 그는 몇가지 업무 방향을 결정했다. 첫째, 특파원들의 정보요구를 충족시켜 주면서 이들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 둘째, 김대중 정권에 대한 뉴스를 끊임없이 생산하도록 유도하고, 가능한 한 자주 감동적인 상황을 연출하도록 조종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안보 이슈에 대해 이들 외신 매체들을 하나로 묶어 종합 연극을 연출하도록 유도한다.

          일단 기본 방향이 정해지자 그는 신속하게 행동했다. 성과를 극대화 하기 위해 대상 목표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다. 모든 상주 외신 기자들의 성향을 분류하는 작업부터 했다. 서울에 상주하는 외국 언론사들과 소속 기자들을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세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과 국정원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매체와 중립적인 매체, 그리고 비판적이며 비우호적인 매체가 그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외신은 기본적으로 우호 매체로 분류할 수 있었다. 일본과 유럽, 그리고 미국의 매체들은 대한민국에 대한 보도 방향이 덜 비판적이었다. 일본계 언론사 중에서 아사히신문, 시사통신, 교토통신, NHK, 닛케이신문, 도쿄신문, 요미우리신문, TBS 등은 특히 우리 정부에 우호적인 태도였다. 서구 언론사 중에서도 LA Times, Financial Times,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 미국의 소리 (Voice of America), 타임(Time), 뉴스위크(Newsweek),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등은 우리 정부에 대해 유화적인 보도를 내보내고 있었다.

          중립적인 매체로 분류할 수 있는 외신으로는 AP, AFP, Reuters, BBC, Bloomberg, CBS, CNN등이었다. 이들 매체는 우호적인 매체들보다는 약간 더 비판적인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편견 없이 보도하고 있을 뿐이지 우호매체와 크게 다르지 않는 논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 중립 매체들은 안보 이슈보다는 경제 뉴스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우호 내지 적대적인 매체가 있었다. 일본의 산케이신문, 미국의 월 스트리트 저널,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와 ABC News, 그리고 국경 없는 기자단(RSF) 등이 대표적인 비우호 매체들로 분류되었다. 이들 매체의 특파원들은 과거 군사정부 시절의 언론 탄압 등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김영준 외신 대변인은 우선 이들 비우호 언론인들과의 개별 접촉에 나섰다. 과거 강압적인 접근이 역효과였기에 우선 당근 작전을 시도해 봤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정보기관에 대해 단호하고 강고한 자세를 보였다. 주는 건 받겠지만, 딱히 줄 건 없다는 태도였다. 적어도 이들로부터 협조를 받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는 곧 나종일 차장에게 이러한 사실을 보고했다. 이들을 활용하는 방안은 일단 보류되었다.

          그런 후 그는 우호 매체에 접근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였다. 우호매체라고해서 모두 다 같은 게 아니었다. 미국, 유럽, 그리고 일본계 언론사들은 각기 다른 성향과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접근 방법도 달리해야 했다. 하나씩 분리하여 차례로 개별 접촉하는 방안이 여러모로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섰다

          가벼운 현안은 주로 태평로에 있는 대한매일신보 사옥 18층 외신기자클럽에서 만나 협의했다. 비록 공개적으로 신분을 노출하고 만나는 것이지만, 특파원들은 정보기관 인사와 만나는 것을 상당히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호텔이나 인사동 일대의 한정식당이 제격일 때가 많았다. 만날 때마다 적당한 수준의 정보가 제공된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접촉이 매일 이루어졌다. 한주의 전반부는 약간 까다로운 상대를 만나고, 주의 후반부에는 서로 부담 없는 대상과 만나곤 했다.

          저녁 만찬은 항상 부담스런 자리였다. 우선 서로 마음 터놓고 식사나 하면서 의견이나 교환하자는 취지로 약속을 잡지만, 막상 만나면 자리가 늘 어려워지기 마련이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면서 얘기를 진행시켜 나가는 것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서로 말은 않하지만 치열한 수싸움, 머리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저 친구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나를 만나자고 했을까?' 항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영준 대변인에게 이러한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만찬시에는 수시로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를 떴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 비일비재 했다. 서로 의논하고 협의한 내용을 다음날 아침 보고에 빠뜨리지 않으려면 메모가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급히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포켓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메모하는 것이 습관이 되다시피했다. 그런 까닭에 서로간 빈번한 이석은 너그럽게 이해되곤 했다. 그것은 꼼수도 실례도 아니었고, 양해된 "게임의 규칙"이었다.            

          외신 기자들은 특종 수준의 정보를 지원받기를 원했다. 간혹 탈북자와의 면담을 요청하거나 자신들이 취재해 알고 있는 대북 정보의 사실을 확인하는 요구가 흔히 있었다. 출처를 분명히 해두려고 확인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로간에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이야기는 대개 충실하게 지켜지는 편이었다.

          해가 바뀌고, 대통령 취임 1주년이 되었다. 청와대로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 해서라도 전 세계의 영향력 있는 매체에 대통령에 대한 특집기사를 싣도록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지시 받은 내용은 결과물을 첨부해서 보고해야 한다. 지시가 이행되지 못하면 변명은 용납될 수 없었다. 그는 크게 심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만, 주요 외신기자들의 협조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

          외신 기자들과의 만남이 익숙해질 무렵, 나종일 차장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나 차장은 "적어도 분기에 한 번 정도는 자신이 직접 이들 특파원들과 만찬모임을 가지겠다."고 나섰다. 아무래도 고위 인사가 직접 나서면 외신과의 스킨쉽이 훨씬 더 긴밀해 질 것이었다. 제공해 줄 수 있는 정보의 질도 물론 다를 것이다. 외신들은 국정원의 제의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일본계 외신들이 좋아했다.

          외신기자들과 차장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우선 외신을 지역별로 분류했다. 가장 많은 특파원들이 있는 일본지역과 외국 언론사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이 한 그룹으로 구분되었다. 일본 기자들은 대개 한국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교감도 쉽게 이루어지는 편이었다. 서방기자들이 경제문제에 관심이 많은 반면, 이들은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이러한 정보는 국정원이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 만남이 일방적으로 정보만 제공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외신 기자들에게 협조를 당부하는 자리가 되었다. 일부 특파원들의 취재 행태가 한국의 실정법을 위반하고 있으므로 주의를 주기도 했고, 어떤 보도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으므로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균형 있는 보도를 해주길 요청하면서, 국정원과 외신간의 업무 지원이 원활하게 될 수 있기를 당부하기도 했다.

          때로는 의견 대립으로 즉석에서 가시 돋친 설전이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참석한 그 누구도 이와 같은 전무후무하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사소한 다툼으로 망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 모임은 나종일 차장이 재직하는 동안 순조롭게 운영되었다.

          이들이 관심을 표명하는 주제는 다양했다. 예를 들면, 북한이 식량난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북한체제의 변수가 무엇인지, 대량 탈북으로 인해 북한체제의 붕괴 조짐은 없는지,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이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 김정일의 동향이나 북한의 핵개발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쿠데타 발생 가능성, 정권의 붕괴 가능성도 물어왔다. 심지어 국정원의 보호를 받고 있는 황장엽이 늦게 손주같은 후손을 얻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에 대해서도 궁금해 했다.

          황장엽. 그는 주한 외국 언론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인물이었다. 국정원은 그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모든 일정을 조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황장엽은 국정원이 외신들을 조종 통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였다. 호의적인 언론에게는 면담의 기회를 먼저 주고, 적대적인 언론에게는 면담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황장엽을 지렛대로 삼는 전술은 그런대로 잘 먹혔기에, 국민의 정부 국정원은 그를 그런 용도로만 사용했다. 비유하자면, 천하의 보검을 가지고 푸줏간에서 소 잡는 데 사용한 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