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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 프로젝트(연재중)/9. 대외협력보좌관

9. 대외협력보좌관실

1998 2, 김대중 정권이 출범했다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이름하여 “국민의 정부”라고 했다.

국가안전기획부 직원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치루는 홍역이었지만 이번 정권 교체의 여파는 어느 정도일런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새로 대통령에 취임한 사람은 바로 자신들이 납치하고 감금하고, 상시적으로 미행, 도청하고 탄압했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안기부의 전 요원들은 마치 마치 최종 선고를 앞둔 사형수들 마냥 다가올 개혁의 칼날 앞에 숨죽이며 기다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초대 정보기관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이종찬이었다. 그는 중앙정보부 공채 1기로 정보부에 입사하여 20여년간 정보기관에서 잔뼈가 굵은 정보 베테랑이었다. 지난 1979 10, 김재규 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그해 12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쿠데타로 집권하자, 그 이듬해 그는 중앙정보부 기조실장에 취임하여, 실질적으로 중정을 해체하고 안기부를 신설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었다. 그의 표현대로 손에 피를 묻힌것이다. 그후 그는 정치권으로 진출해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에까지 도전했지만, 결국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 편에 섰다가 정보기관장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그런 그에게 또다시 정보기관을 개혁할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새 정부에서 그만큼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을 잘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가 정보기관장으로 부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고 국민에게 봉사하는 기관으로 정보기관이 거듭 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원했던 것 같다. 이참에 과거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 권력집단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어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우선 문패부터 갈아 치웠다. 거의 20년간 사용해오던 국가안전기획부라는 이름을 버리고 국가정보원으로 바꿨다. 국민에게 친절하게 봉사하는 기관의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였다. 국민들에게 정보기관을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방안이 마련되었다. 국가안보관을 지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직원들의 의식을 개혁하기 위해 곳곳에 조형물들을 세웠다. 청사 정면에는 "정보가 국력이다"라는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새긴 표지석이, 운동장 옆에는 광개토대왕비의 모형이, 정면 옆에는 순직한 요원들을 별로 세긴 보국탑이 새로 들어섰다. 동시에 직원들의 사기를 앙양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되었다.

돌이켜보면, 1961 6 10일 창설 이래,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정보기관의 역사였다. 중앙정보부는 설립 당시부터 혁명의 보위기관이었다. 정권 안보가 곧 국가 안보였다. 정보기관의 존재이유는 정권을 보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권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어떠한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때로는 민주주의와 준법질서도 정권 안보라는 대의 앞에서는 희생되어야 했다. 오해와 질시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그들은 조국의 안보와 근대화라는 목표를 위해 노력했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화를 이룩했다.

하지만, 정작 일선 요원들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머리에 하얀 꽃이 피는 것도 모르면서 음지에서 청춘을 불살랐건만, 돌아오는 건 지탄과 비난뿐이었다‘개나리, 진달래가 우리 주변에서도 피었던 적이 있었던가?’ 가족들과 제대로 피서를 갔던 건 언제였는가? 청사를 둘러싼 가을 산의 아름다운 정취와 풍경을 느껴볼 틈이 있었던가? 한겨울 늦은 밤에 홀로 눈길을 걸어 청사를 나오면서 느껴본 희열과 자부심은 또 어떤 것이었던가? 불철주야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바쳤건만, 이제는 청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정보기관이 새로운 시대를 맞아 선진 조국을 건설하는 견인차가 되기를 바랬다. 모두가 새로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과거사의 오명을 씻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고 국가의 안보와 국익만을 위해 전념하는 순수 정보기관으로 새 출발하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과거의 자랑스런 전통 위에서 조국통일과 선진조국 창조에 매진할 수 있는 전환점이 오기를 간절히 바랬다.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민주질서의 수호자로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기를 마음 속으로부터 빌었다. 이들의 앞날은 희뿌연 회색이었다.

1998 8, 더위가 가시지 않은 어느 여름날, 신설된 대외협력보좌관실에 모여든 요원들은 모두들 긴장한 모습이었다. 서로간에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지만, 이미 아름아름으로 상대방에 대해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사무실의 중심에 이번에 새로 특채되어 입사한 김한정이 있었다. 그는 지난 5년간의 미국 유학으로 국제적인 감각과 식견도 두루 갖춘 사람으로 알려졌다. 이종찬 원장을 도와 이 원장이 추진하는 비밀 사업을 주관하게 될 사람이었다. 대통령의 공보 비서 출신에다가 서울대학교 출신이었기에 처음부터 차별화된 자원이었다. 남다른 성실함과 근성으로 대통령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는 평가가 따랐다. 그는 이제 대통령을 위해 새로운 차원의 봉사를 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또 한 사람, 김영준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영국에서 8년간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후 귀국한 사람이었다. 라종일 차장이 특채한 인물이었다. 국내 강단에서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에 나 차장의 간곡한 도움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입사한 사람이었다. 그는 애초에 나 차장의 특별보좌관으로 채용되었다가, 대외협력보좌관실이 개설되면서 선발되어 왔다. 국정원의 외신 대변인으로 활동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이제까지 해오던대로 차장의 특별 보좌관 역할도 계속하게 될 예정이었.

마지막으로 조준오란 인물이 있었다그는 새로 출범한 정권의 인물들과 개인적인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라고 알려진 조승형 대법관의 조카였다. 조승형은 대통령의 오랜 측근이자 대통령 비서실장 물망에 오르던 사람이었다. 대통령에게도 할말을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조준오는 재치와 순발력이 있는데다, 상황을 비교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온갖 정보를 신속하게 수집하고 또 그 정보를 적절히 활용하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는 공무원으로서의 기본적인 품성에 의구심이 들때가 많았다.

이들 세 명은 모두 외부에서 새로 수혈한 젊은 피였다. 이른바 "특채" 요원들이었다. 대외협력보좌관실에는 이들 특채 요원들 말고도 해외 공작부서에서 차출해온 인원이 몇명 있었다. 모두 국정원 내의 최정예요원들이었다. 모든 면에서 지휘부가 요구하는 까다로운 자격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한 명을 선발하기 위해 인사과에 보관하고 있는 모든 직원들에 대한 인사자료를 철저하게 검토한 후에 선발된 자원이었다. 국정원 내의 수천 명의 요원 중에서 최고 엘리트들이라고 자부할만한 인재들이었다.

대외협력보좌관실은 이종찬 원장이 원장 직속으로 설립한 조직이었다. 이를테면 이 원장의 야심작이자 필살기였다.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주기 위한 비밀병기였다. 이 조직의 임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모두들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아는 사람들끼는  NP 사업” 또는 “S 사업”이라고 불렀다. 김한정과 그의 조수였던 조준오가 핵심적인 일을 맡았고, 해외 언론을 담당하는 김영준 외신 대변인과 그의 팀이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참 지난 후, 이종찬 원장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대외협력보좌관실의 임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론 사실이 아닌 정치인의 진술이.

『“국가정보원장으로 와 보니 (내부보고서 중에) 여러 정보들은 많은데 경제정보가 전달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정보기관의 역할이란 통치권자에게 다가올 위기를 예측하고 이를 사전에 보고하는 것이다. IMF 가 온 이유도 사실 정보기관이 경제정보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제경제학을 공부한 박사들을 불러와 대외협력보좌관실을 만들었다”』 하지만, 기자가 확인해보니, 이 원장이 채용했다는 『“박사급 인사들은해외에서 국제경제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학을 공부한 이들이었다.”』[1]

이종찬 원장이 지명한 대외협력보좌관은 이종훈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주고와 육사를 나온 엘리트 간부였다. 이종찬 원장과는 오래전부터 같이 근무했기 때문에 서로 잘 아는 사이이기도 했다. 이종훈 보좌관은 1998 8월 뉴욕 부총영사 직을 마치고 본부로 귀임하자마자 대외협력보좌관에 보임되었다. 그의 경력으로보아 안성마춤의 자리였다. 그는 젊은 시절에 노르웨이어 연수를 다녀온 데다. 북구팀장, 동구과장과 해외공작국 부국장까지 역임했기 때문에 노벨상 업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정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종훈 대외협력보좌관이 이 업무에 적임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는 거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랜 공작관 생활로 인해 신중함이 몸에 베어 있었다. 이 일의 위험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인지, 그는 신중함이 지나쳐 소심하게 보일 때가 많았다. 그는 성질 급한 김한정과 자주 부딪혔다. 얼마가지 않아 그는 공작 일선에서 도태되었다. 결국 진급도 하지 못한 채 옷을 벗었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 전라도 출신 간부 중에서 진급하지 못하고 옷을 벗은 것은 그가 유일한 경우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노벨상 공작은 탑시크릿이었다. 성역이었다. 누구도 아는척 할 수도 없고 얘기할 수도 없었다. "알면 다쳐"하는 분위기였다. 대외적으로 드러난 대외협력보좌관실의 공식적인 임무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주변 4 대 강국에 인적 네트워크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다음은 월간조선이 취재하여 보도한 대외협력보좌관실의 주요 임무. 

『주변 4강에 대한 국제적인 인맥을 구성한다는 게 목적이었다. 특히 미국 쪽에 큰 비중을 뒀다. 미국에 영향력 있는 인사를 섭외해서 한국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이 텍사스 주지사 시절 부시와의 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 국내 S 기업으로 하여금 텍사스주 현지에 지사를 세울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S 기업은 실제 그곳에 지사를 만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해외에서 자주 거론될 수 있도록 홍보전략을 짜는 일도 했다. 그런 일은 주로 당시 미국유학을 마치고 국정원에 특채됐던 김 실장이 주로 담당했다. 그는 김 대통령이 해외에서 자주 거론될 수 있도록 이벤트를 만들었다. 미국 현지에서 한반도 평화와 인권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는 일도 했다. 』[2]

월간조선은 대외협력보좌관실의 노벨상 공작업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어렴풋히 내비치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도 김한정 실장을 포함해 몇몇 인사들의 역할 때문에 그렇게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IMF 이후 국가 신인도 높이는 게 최대의 목적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화와 인권에 대한 신념이 강한 대통령이라는 점을 홍보하면 국가 신인도도 높아질 것이라 판단했다. 국내정치상황과 노벨상 등을 떠나 남북문제가 잘 풀리면 경제도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것을 대외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런 역할을 대외협력보좌관실에 있었던 김한정 실장이 주도적으로 했다.』[3]

이 사무실의 또다른 임무는 해외언론을 조정 통제하는 일이었다. 이 일도 노벨상 공작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임무였다. 해외 언론은 노벨상 수상의 여건을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월간조선은 해외 홍보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김한정 실장과 비슷한 시기에 사무관으로 특채된 김 모씨는 국내학자와 해외 언론의 접촉을 주선했다. 그는 국내 주재 해외언론 특파원들을 직접 관리했다. 관리목적은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에 대해 해외언론이 우호적인 보도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특파원들을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어 (한국에) 우호적인 언론을 골라 좋은 정보를 주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국정홍보처 산하 해외홍보원과도 유기적으로 연결됐다』[4]

 


[1] 월간조선 2003.3월호, "김대중 노벨평화상 국제로비 진상"

[2] Ibid.

[3] Ibid.

[4]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