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P 프로젝트(연재중)/4. 역사에 남을 인물

4. 역사에 남을 인물

양준용이라는 분이 있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 LA지역에서는 꽤 유명한 원로 언론인 중의 한 분이다. 미국 최대의 한인 방송사인 LA 라디오코리아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 방송의 시사좌담 토요 스페셜에 단골 초대 손님으로 출연한다.  “토요 스페셜은 최영호 부회장이 직접 진행하는 라디오코리아의 간판 프로그램인데, 미국 동포 사회에서 인기 있는 프로그램 중의 하나다.  

지난 2010 9 4, 양준용 고문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인간 김대중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라는 주제로 대담한 적이 있다. 그 전주, 그러니까 20108월 마지막 주에는, 마침 필자가 동 프로그램에 출연했었다. 그 때 필자는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라는 책의 출판과 관련된 얘기를 주로 했었다. 양 고문의 9월 첫 주 출연은, 말하자면, 필자의 대담의 후속편 같은 성격이었던 셈이다.

방송에서 그는 인간 김대중과의 오랜 인연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1960년 초에 경향신문에 입사하여 신출내기 정치부 기자 시절부터 당시 갓 국회의원에 당선된 김대중 의원과 가까워졌다고 한다. 장면 정부에서 김대중 씨가 임시 대변인을 하던 시절부터 그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후 60년대 전 기간에 걸쳐 야당의 대변인을 하던 김대중 의원과 동고동락하는 사이가 됐다는 것이다. 당시 일선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서도 유독 그가 김대중 의원과 가장 친했던 기자로 알려졌다고 한다.

그후 그가 신문사를 그만두고 동경에 체류할 당시,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사건 직후 일본 경찰은 김대중의 자작극이라는 분위기로 몰고 가고 있었는데, 그가 일본 언론들을 설득하여 중정의 납치라는 쪽으로 여론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김대중을 구명하는 데 그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해서 그는,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3일만에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산 자택에서 저녁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그 자리에는 재일 한국인으로 DJ의 소학교 동창인 김종충과 DJ의 일본 망명시절 비서실장이었던 조활준이 함께 했다고 한다.

다음은 대담 내용 중의 일부다. 조금 거칠고 직설적이지만 그대로 옮겨 본다.

(최영호) 김기삼씨 책의 내용에 의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많은 공작을 했다는 데 그기에 동의하십니까?

(양준용) 그게요. 공작 정도가 아니라 아주 미쳐 있었어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 측근들이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미쳐 있더라고요. 눈에 불을 켜고 다니더라고요. 노벨상, 노벨상하면서 미쳤더라고요.

(최영호) 김대중씨가 직접 노벨상 공작을 지시했다고 생각하세요?

(양준용) 그럼요. 본인이 그런 욕심을 안 부리면 어느 누구도 그런 짓 못해요. 김대중씨 하면요, 그 욕심은 이루 말로 표현을 못해요. (중략) DJ는 보통 사람들이 상상을 못할 욕심을 부려요. 그 탐욕, 그 탐욕은 무서워요. 그게 어디까지 갔는가? 그게 노벨상으로 가더라고요. 노벨상으로.』[1]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어지는 양준용 고문의 증언이다.

(양준용) 학력 콤플렉스가 대단해요. 평국회의원 때부터 학력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더라고요.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런 얘기를 안하지만, 일본 NHK에는 했어요. 그 컴플렉스를 없애기 위해서 무척 노력하더라구요.

측근이나 비서관들이 해외 나들이를 가면 총재님 명예박사 학위 헌팅하는 게 그 사람들 일이었다고요. 팀을 짜가자고, 돈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매수를 한다든지 부탁을 한다 그거예요.』[2]

양준용 선생의 증언이 아니더라고 요즘에는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설은 당연한 것으로 받어들여진다. 그동안 언론보도가 몇 차례 있었고, 필자도 이 문제를 가지고 몇년간이나 세상에 알리고 있다. 하지만, DJ가 노벨상을 수상할 당시만 하더라도 노벨상을 받기 위해 공작을 했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워낙 비밀스럽게 진행됐기 때문에 외부에는 낌세도 알려지지 않았다설령 알려졌다한들 믿기 힘든 얘기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내부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지만, 외부에서는 철저하게 감추어진 일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한순에 바뀌는 경우가 있다. 1997 12,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이 그런 경우였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의 노벨평화상에 대한 수상 열망은 이제 더 이상 꿈이 아니라 가까운 시일 내에 실현 가능한 현실이 됐다.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이제 한 나라의 모든 자원과 인력을 자기 마음대로 총동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꿈에 그리던 노벨상도 단순히 재임 기간내 이루어질 시간의 문제가 됐던 것이다.  

그래서 였을까? 노벨상 사냥극은 처음부터 격정적으로 그 서막이 올랐다. DJ 주변은  일순간에 노벨상 열기로 달아 올랐다. 그들에겐 거칠 것이라곤 없어 보였다. 아직 취임식을 거행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다음은 노벨상이다.”라는 속삭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앞에서 본 양준용 고문의 증언처럼, 모두가 노벨상에 미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노벨상을 따오기 누가누가 잘하나?” 일대 경연장이 벌어졌다. 하지만, “어떻게?” 방법론이 문제였다. 자기들 내부에서는 처음부터 중구난방, 백가쟁명식의 논의가 풍성했다. 그런 와중에 무한 아부와 충성 경쟁이 뒤따른 것은 불문가지이다.

기본 프레임은 간단했다. 노벨상을 사냥하기 위한 공작은 청와대가 주도하고, 공작 일선에서 실무는 국정원이 수행하는 방식으로 하기로 했다. 다행히 국정원에는 이미 노벨평화상에 관한한 10여년간의 축적된 노하우가 있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대통령의 지시라면 불속이라도 뛰어드는 충견들이다. 과거에는 DJ를 구박하는 일에 앞장 섰지만, 이제 정권이 교체된 마당에 새사람을 심어서 진행하면 될 일이었다. 소문 나지 않게 조용히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데는 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참 좁은 사회다. 한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다. 비밀이 지켜지기 어려운 곳이다. 후각이 발달한 기자들이 동교동의 이런 분위기를 놓칠리가 없었다. 너무 과도한 의욕을 부리는 자들에게서 비밀이 새나가고 있었다.

대통령 당선의 열기가 채 가시지않은 1998년 초, 일요신문이란 잡지가 김대중의 노벨평화상에 관한 기사를 연속으로 내 보냈다. 일요신문은 주로 지하철 가판대에서 팔리는 타블로이드판 주간지이다. 동종의 잡지로서는 가장 많이 팔리는데다, 기사의 신뢰도면에서도 가장 앞서 있기도 했다. 기사는 의미심장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첫번째의 기사는 1998 1월 말에 나왔다.  DJ 대통령 만든 아대재단의 노벨평화상 플랜” 제하의 기사였다. 그 기사는 그해 113일 저녁 서울 마포 서교호텔에서 열린 아태재단 신년하례모임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날 행사는 김 당선자의 의지가 반영돼 이수동 재단 행정실장 주관으로 특이하게 치러졌다. 우선 메뉴가 톡톡 튀었다. 장소가 호텔임에도 우거지탕에 막걸리가 나왔다. 호텔 측에서는 “이런 행사는 처음 본다”고 했다.

참석자들의 면면도 재미있었다. 재단과 후원회 관계자, 그리고 아태아카데미 회장단 등의 참석은 기본이고, 재단이 세들어 있는 아륭빌딩 수위와 청소원들도 초청 받았다. 또 재단 주변 식장의 주인과 종업원들, 재단에 우편물을 배달하는 우편배달부도 김 당선자와 덕담을 나눴다. 재단과 거래하는 은행과 인쇄소 담당자들도 나왔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모두 25십여명. 박홍 전 서강대 총장 등 그동안 재단측과 불편한 관계였던 인사들의 모습도 보였다.』[3]

이어 기사는 임동원, 최규선 등 아태재단 관련 인사들의 동정과 향후 거취를 상세히 전하면서, 앞으로 이 단체가 DJ의 노벨상 수상을 위한 전위기구가 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였다.

『오유방 후원회장은 이날 하례식에서 “김 당선자를 위해 국가와 민족의 이익에 봉사하는 국민적 두뇌집단으로서 사명과 책무를 다해 나가야 된다.”고 말했다… 아태재단의 이런 단기적인 변화와 함께 재단은 앞으로 ‘위대한 김대중’을 만드는 일에 전력할 것으로 관측된다.

“재단은 김 당선자의 이념이나 이상,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김 당선자를 연구, 개발하고 남북관계를 화해국면으로 만들어 노벨평화상을 타는 기초작업을 하게 될 것”이라는 한 관계자의 말은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앞으로 재단이 ‘역사에 남는 김대중’을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될 때 구체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FDL-AP 또한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FDL-AP의 목적이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 인권보호, 지구적 민주주의 실현, 민주지도자 들과의 유대강화’ 등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4]

한달 후에 나온 두번째 기사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요신문은 DJ와 그 측근들의 노벨상 구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청사진을 입수했던 것이다.  DJ 노벨 평화상 전략”이라는 제목을 단 이 기사는, DJ의 노벨상 공작과 관련하여 그 주제와 추진방향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위한 은밀한 물밑작업이 처음으로 수면위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기사의 내용은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해 그의 측근 인물들이 국내캠프와 해외캠프로 각각 나뉘어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아래는 기사 내용 중 일부 발췌한 내용이다.

『국내캠프는 남궁진 의원의 지휘아래 1998 1 24일 현역의원 80명의 서명을 받아 노벨심사위원회에 추천서를 발송하는 등 수상에 필요한 절차를 실행했다. 해외캠프는 국정원 해외담당 라종일 차장이 주도했다. 그와 이종찬이 이끌고 있는 국정원의 조직은 이런 공작을 수행하기에 최적의 정부조직이었다. 실제로 국정원은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해외에서도 외교통상부를 압박하며 해외공작 업무를 주도했다.

외교통상부는 해외 현지국가와 외교나 통상 업무를 주로 담당하거나 교민들과의 관계 유지에 주력했다. 그러나 중요한 공작사항에 대해서는 국정원이 본국의 지침을 받아 주도하고 외교통상부는 이들의 지침에 따르거나 협조하는 식으로 일이 추진되곤 했다.

라종일과 함께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의 조카인 이영작이 해외에서의 활동에 한 축을 담당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워싱턴 소재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었다. 이영작은 대통령의 인척이라는 배경을 십분 활용하며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대통령과 오스카 아리아스 코스타리카 대통령, 그리고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 등으로부터 추천 의사를 확인하는 등 저변을 확대해 나갔다.』[5]

DJ와 그 측근들 사이에서는 이 두 번의 보도가 그야말로  ‘가슴 철렁한’ 사건이었다. 노벨상 수상 공작이라는 천기를 누설한 최초의 뉴스 기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기사들은 당시에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하고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주요 일간지에서 낸 기사가 아니라, 가판대에서 판매되는 주간지 기사였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그러려니 하고 아무도 주목해서 읽지 않았던 것이다. 대통령 당선자 시절의 허니문 분위기도 한 몫했을 것이다. 일간지들이 당선자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DJ와 그 측근들로서는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일요신문의 이 기사들은 그 후 오래도록 노벨상 공작팀에게 보안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워 준 계기가 되었다. 다음에 보는 국정원 내부의 두 문건에 이 기사가 언급되고 있는데, 첫번째 문건은 “S공작 관련 내용이라는 제목으로 2000년 초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4 페이지 짜리 문건이다. 이 문건은 일요신문의 기사 내용을 아래와 같이 요약하고 있다.[6]



두번째 문건은 2000.4.21. 작성된 금년도 정세전망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12페이지에 달하는 장문의 보고서인데, 국정원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문서이다.

이 문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보안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98-99년간 여권 내 일부 참여자들이 공명심에서 사적인 활동내용을 언론에 누설, 추적기사를 유도한 바 있음이라고 경고하고 있다.[7] 여기에 인용된 일부 인사라는 사람은 아마도 최규선과 이영작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 라디오코리아, 2010.9.4., “토요 스페셜

[2] Ibid

[3] 일요신문, 1998.1.28., DJ 대통령 만든 아대재단의 노벨평화상 플랜

[4] Ibid.

[5] 일요신문, 1998.2.25., DJ 노벨평화상 전략

[6] 국정원 내부 문건, “S사업 추진 내용” p. 2.

[7] 국정원 내부 문건, 2000.4.21. “금년도 정세 전망” p.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