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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 프로젝트(연재중)/3. 13전 14기의 신화

3. 13전 14기의 신화

“나에게는 소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벨평화상을 타는 것입니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김대중은 사석에게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지난 1971년 그가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박정희 정권을 위협하는 득표력을 보였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그저 깜짝 스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후, 해외를 떠돌면서 반유신 활동을 하다가, 1973 8월 동경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납치되면서부터 일약 국제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호자로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덕택에 그는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에서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국제 여론에 힘입어 미국으로 도피할 수 있었다.

그의 길고 긴 노벨평화상 도전사는 1986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 돌아와 또다시 대통령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군부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지도자로서 그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추진하였다. 이듬해인 1987 1, 그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첫번째 노벨상 추천은 그의 민주화 투쟁에 공감하고 지지를 보내던 다수의 외국인들이 추진했다고 알려져 있다.

1987년은 대한민국에 민주화의 봇물이 터진 해였다. 그해 1, 박종철 열사의 억울한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전두환 독재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봄이 되자, 4.13 호헌 조치’에 저항하는 민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호헌철폐”를 외치면서, 직전제 개헌을 요구했다. 여름에 접어 들면서  ‘6월항쟁’의 거대한 파도가 전국을 강타했다. 수주간의 격렬한 데모가 이어졌다. 이윽고, 노태우 후보가  6.29 선언’에서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임으로써 6월의 명예혁명은 막을 내렸다. 그해 가을에는 구로에서 거제까지 노동운동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노르웨이의 노벨상 위원회가 한국의 이러한 민주화 바람을 그냥 지나쳤을 리가 없다. 아마 그들은 한국의 민주화 열기에 놀라면서, 김대중이란 인물을 숨죽이면서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 해 DJ는 “노벨평화상에 가까이 갔다”고 한다. 다음은 박경서 전 인권대사가 얼마전 인터넷 언론, 프로시안에 밝힌 내용이다.

『내가 스위스 제네바의 WCC에 근무를 시작한 게 1982 2월부터이다. 나는 그때부터 김대중은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 후보 자격이 충분하며, 잘하면 수상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때, 그의 저서 중 하나인 <김대중 옥중 서신> 등을 읽게 되고 몇몇의 번역본은 제네바로 갖고 갔으며, 그곳의 동료들에게 일독을 권하기도 하였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스위스 제네바의 에큐메니컬 센터에는 루터교 세계연합체 사무총장이었던 노르웨이 출신 주교 구나 스탈셋 목사가 나와 함께 근무하면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는 1983년 이미 노벨평화상 최종 심사위원회의 5명 중 한 사람이었고, 심사위원회 부의장으로 수고하고 있어서 그 책들은 자연히 그에게 전달되었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이 일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의 결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7 8월 최종 3인의 후보자 중 한 명으로 올라 수상자가 될 가능성 매우 커졌다. 그런데 노벨 평화상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다. 이에 따라 노벨상 심사위원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는 설이 있는데, 그렇다면 수상자로서는 안 된다.”는 조건으로 그를 수상 후보(short list) 3인에 넣었고, 나는 이 문제를 밝혀야 했었다.

한국에 출장을 왔다. 동교동 조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나에게 오랜 숙고 끝에 대통령에 더 뜻이 있어서 평화상은 뒤로 미룬다는 당신의 뜻을 전했고, 나는 이를 서울에서, 스탈셋 목사를 통해, 최종 심사위원회에 통보하였다. 이 날이 1987 8 14일이었다.[1]

DJ의 처조카인 이영작 교수도 이와 유사한 증언을 한 적이 있다.

『사실 그때 김대통령이 대통령후보를 YS에게 양보했다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겁니다. 대통령도 사석에서 그런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집권을 해서 민주화를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겁니다.[2]

“DJ도 사석에서 그런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는 이영작 교수의 증언이 특이하다. 이영작 교수는 단순히 DJ의 처조카가 아니라 미국에서 인권연구소를 운영하면서부터 DJ의 최측근으로 오랜동안 활동한 사람이다. 그는 1997년 대선에도 상당한 기여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대선과정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일들을 정리하여 2002년에 이영작 리포트라는 책을 냈는데, 당시 출판을 둘러싸고 청와대와 크게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지만, 만약 당시에 DJ YS가 단일화를 이루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군부 집권을 5년 일찍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민중의 염원대로 흐르지 않았다. 당시 YS DJ는 서로 먼저 대통령이 되겠다며 갈라섰다. 야권은 YS를 지지하는 세력과, 비판적으로 DJ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야권의 분열은 정권교체의 실패를 의미했다.

선거패배후 DJ는 권력도 잃고, 명예도 잃는 최악의 결과를 맛보아야 했다. 그해 노벨평화상은 콰데말라의 평화협정에 서명하여 중부 아메리카의 평화를 위해 기여한 공로로 오스카 아리아스 산체스에게 돌아갔다.

첫번째 절호의 기회를 놓친 후에도,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손에 넣기 위한 노력은 끊질기게 계속되었다. 그때부터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추천은 연례 행사가 되었다. 이후 무려 14 차례나 연속으로 노벨평화상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의 측근들은 매년 1월이면 세계 각계로부터 추천장을 받느라 분주하였다. 주로 남궁진 비서가 추천서 업무의 총대를 멨다고 한다. 그는 김대중 정부에서 정무수석을 한 사람이다. 추천과 관련, 1999년 신동아에 소개된 증언 한 조각.

『그 동안 DJ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사람들은 주로 외국인이었다. 유럽 국가들, 특히 독일 의회 의원들이 노력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영작 교수는 “미국에서는 포글리에타 주이탈리아 대사, 남캘리포니아대 조지 타튼 교수, 미국 피츠버그에 있는 가톨릭계 대학의 윌리엄 커 총장 신부 등이 애를 많이 썼다”고 말했다. 노벨위원회에서는 미국 정치인들이 영향력을 행세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주로 교수들이 추천했다는 것...[3]

기회는 다시 찾아 오는 법. 그 후에도 실제로 DJ가 유력한 수상후보로 떠오른 때가 있었다. 그것은 1992년 대선 패배 후 이른바, “아름다운 은퇴”를 한 직후였다. 그는 93년 초,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몸을 피했다. YS로부터의 정치보복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머물면서 평화주의자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6개월 간의 영국 체류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아태평화재단을 창설했다. 자신이 초대 아태재단이사장을 맡고, 이듬해에는 임동원을 사무총장으로 앉혔다. 아태평화재단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표방했지만, 사실은 DJ의 정계복귀를 추진하기 위한 불한 교두보였다.

그 해 김대중은 또다시 최종 압축 명부(shortlists)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해에는 너무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다. 그해의 노벨평화상은 남아공의 인종차별주의를 종식시키고 남아공에 민주주의의 초석을 깐 공로로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민족회의 (ANC)의장과 프레데릭 클라크 남아공 대통령에게 공동으로 수여되었다. DJ로서는 운이 없음을 한탄해야 했다.

두 번의 결정적인 수상 기회를 놓쳤지만, 김대중의 노벨평화상에 대한 열망은 더욱 높아져만 갔다. 다음해인 19941월 말, 그해 추천서가 마감되기 직전에, 그는 10일간 북구 3개국 순방을 떠났다. 자신이 몸소 현지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노벨상 관계자들과의 개인적인 인연을 만들어 두고자 하는 목적이 더 컸을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인권과 민주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서구 뿐만 아니라 북구 여러나라에 소개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라는 기구를 만든 것도 이때였다. 이를 통해 자신도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주 지도자들과 같은 반열에 오르기를 원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민주화에 대한 노력을 서방 세계에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초대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사무총장은 김상우 의원을 앉혔다. 그는 DJ의 의중을 잘 이해하고 충복 역할을 충실하게 했다. 아시아와 세계의 민주 지도자를 불러 들이고 여러가지 이벤트성 행사를 기획하고 시행하는 데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이 즈음, 김대중은 포린 어페어 (Foreign Affairs) 지를 통해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과 민주주의에 관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리콴유 수상은 “아시아에는 유교 문화와 오랜 기간의 권위주의 통치가 펼쳐졌기 때문에 체질적으로 민주주의를 적용하기 어렵다.”고 주장한 반면, 김대중은 백성을 주인으로 섬기는 유교적 전통을 예로 들면서, “아시아에서도 서구식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김대중은 “민주주의는 세계 어느 곳에도 통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고 역설했다. 김대중의 이러한 발언은 다분히 전략적인 것이었다. 노벨상위원회가 주기를 기대하고 한 말이다.

그해에도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또다시 예상치 못한 경쟁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번에는 중동의 모랫 바람이었다. 1994년 노벨평화상은 중동의 평화를 정착시킨 공로로 야세르 아라파드와 시몬 페레스, 그리고 이자크 로빈에게 돌아갔다.

이후 DJ와 그 측근들의 수상 노력은 한단계 업그레이드 됐다. 이때부터 국내에서 정당 차원으로 DJ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기택 민주당 대표위원은1994 12, 당시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이던 DJ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작업을 지시했다. 영일만 짠 소금으로 알려진 그가 DJ에게 확실하게 선심을 선 것이었다. 당시 추천 공적서에는 아태민주지도자회의 결성 등을 통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에 기여한 DJ의 공로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DJ와 그 측근들에 의하면, 그 때가 노벨상 수상 노력에서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YS 정부가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당시 주노르웨이 한국대사관에서 “YS의 이미지를 좋게 하고, DJ의 이미지는 흠집을 내는 작업이 이뤄졌다.”고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대사관에 근무하는 안기부 요원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신동아 기사에는 익명으로 이에 대한 증언이 있다.

95년경이었어요. 노르웨이를 방문한 길에 노벨위원회 사무총장인 룬데스타드 교수를 만났더니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DJ도 부패하지는 않았는지, 재벌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지 않았는지 물어요. 근거가 없는 음해성 루머라고 해명은 했지만 상당히 곤혹스러웠어요.[4]

이후 김대중은 아시아의 민주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구축하기 위해 아시아의 민주지도자들과 연대하는 사업을 더욱 강하게 추진했다. 그 첫단추가 바로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지의사 표시였다.

김대중이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표명하면서부터 미얀마의 민주주의는 아태 민주지도자회의의 주요 이슈가 되기 시작했다. 이 단체의 김상우 사무총장은 미얀마 민주화를 지원하는 사업에 DJ의 대리인 노릇을 했다. 그는 미얀마를 세 차례 방문했고, 아웅산 수지를 두 번이나 만났다. 95년에는 가택연금 상태인 아웅산 수지에게 DJ 친서를 전했다. 이 친서에는 “아태 민주지도자회의가 아웅산 수지와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김상우 의원은 15대 국회에서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의원 모임을 만들고 의원 110명의 서명을 받아 96년 여름 다시 미얀마로 들어가 두번째로 아웅산 수지를 만났다. 97 2월에 갔을 때는 아웅산 수지를 만나지 못하고 공항에서 체포되어 강제 추방당해야 했다. 당시 김상우 전 의원은 추방된 다음날인 97 28일 태국 방콕에서 30여개 사의 외신기자를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에도 아태 민주지도자회의는방콕과 서울을 오가며 미얀마 민주화 관련 세미나를 열면서 그 열기를 이어갔다.

 


[1] 프레시안, 2011.3.8., DJ는 이미 1997년에 강력한 노벨상 후보였다”

[2] 신동아, 19998월호, 김대중 대통령과 노벨평화상

[3] 신동아, 1999 8월호, 김대중 대통령과 노벨평화상

[4]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