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실을 봤다'
미 망명 신청한 전
DJ 노벨상
수상, 대북 15억 달러 불법송금 등 의혹 폭로
광야의
외침이라고 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메아리도 없는 외로운 고함을 치고 있는 심정이라고 했다. 국가정보원에 7년 몸담았다 사표를 던진 후 최고 통치자에 비수를
들이댔던
2003년 정초, 인터넷 언론에
불순한
정치적 혐의에 진위 논란이 겹치며 화제를 불러일으킨 그의 폭로는 그러나 시대의 물결에 이내 묻혀 물보라에 그쳤다.
2001년 도미한 김씨는 결국 지난 3월 미 망명을 신청하며 조국을 등지는 선택을 했다. 가족과 함께 워싱턴서 2시간여 거리에 체류중인 김씨를 만나 폭로의
진의와 주장의 진실, 그리고 망명을 한 이유 등을 들어봤다.
문) 망명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망명신청을 했지만 현재 이민재판에 걸려 있다. 학생비자 신분으로 체류해왔는데, 수업을 자주 빠지면서 신분이 끊겼고 이민국에서 추방재판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다. 아내와 두 자녀는 망명사무소를 통해 망명신청을 밟고 있는데, 가족들의
망명신청이 받아들여지면 나도 추방재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
문) 왜 망명을 택했나.
”
(그가 지난해 1월 인터넷 언론에 DJ정권의
의혹들을 게재하자
문) 당신의 폭로내용은 얼마만큼 사실에 가까운 것인가.
”그 중에는 증권가 찌라시 수준도 몇 개는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 주장의 대부분은 진실이라
확신한다. 오랫동안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의혹을 추적한 것이다.”
문) 왜 폭로를 결심했나.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그러나 DJ 정권이 대북송금
문제를 2억 달러만 인정하고 덮으려 하는 걸 보고 그대로 있을 순 없었다.
DJ는 노벨상을 수상할 목적으로 국가정보원을 동원해 해외공작을 진행하는 한편, 북한의
문) 시대착오적 주장이 아닌가.
”물론 내가 이야기하면
문) 햇볕정책의 성과마저도 부인하는 것인가.
”햇볕정책도 일면적 타당성이 있다. 나도 북한을 지원하고 교류하는 데는 동의한다. 다만 개인적 야심과 이해관계로 왜곡 당했다는 게 문제다. DJ는
취임 후 삼국통일보다 더 큰 일을 한 지도자로 만들어달라고 우리에 지시했다. DJ 우상화 작업하라고
위에서 지시가 내려온 거다. 개인적 야욕과 노욕을 위해
문) 지난 대선 때 당신이 제보한 폭로내용을 한나라당은 공개하지 않았다. 당신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은 것 아닌가.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의 특보인
문) 한국의 안보상황이 위험하다고 처방 내리는 근거는 무엇인가.
”국정원에서 나는 진실을 봤다. 사람들이 나를 수구꼴통이라 욕할지 모르지만 친북세력들은
우리 권력 핵심 깊숙이 빨대를 꽂았다. 내부 정보가 북에 보고될 것이다.
문)
”나는 84학번이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고시를
경멸하던 분위기여서 1차 시험도 치지 않았다. 나는 극악한
좌편향이었다. 독재와 싸우며 독재를 닮아가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 학생운동과 조직활동은 하지는 않았다.”
”나는 반미운동의 실체인 미국을 알고 싶어 카추사를 지원했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사노맹이
일망타진되는 걸 보며
(김씨는 서울대 법대를 마치고 1993년부터 국가안전기획부(현
”회사를 그만 둔 것은 DJ정권을 지켜보며 보통 사람들은 더럽다고 하며
그냥 참지만, 나는 여기 아니면 벌어먹고 못살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문) 하위직으로서
”나는 비록 하위직이긴 하나 해외, 국내, 대북부서를
두루 거쳤다. 내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또 중요 정보에
근접할 수 있는 핵심 보직에 근무했었다. 내가 모르는 것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내 일을 넘어 그 동안 대한민국 전체를 보고자 했다. 그런
노력이 있어 그런 폭로가 가능했다.”
문) 어떻게 살고 있나.
”2001년 11월 단신 도미했다. 이듬해 봄, 가족을 데리고 입국해 현재 펜실베니아주 해리스버그에 체류중이다. 벌이가
없어 월 400달러짜리 정부 보조 프로그램 아파트에서 산다. 한국의
가족들에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 있다. 가끔 워싱턴에서 시장도 보고 나들이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