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회칠한 가면, 악마의 초상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과 대북 뒷거래 실상-
김대중의 노벨상 노욕
국민 여러분께 드립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가면 뒤에 가려진 김대중 정권의 추악하고 위선적인 본모습을 국민 여러분께 알리고자 합니다. 지난 5년간 김대중 정권이 민족과 역사 앞에 저지른 지울 수 없는 범죄행위를 저의 양심을 걸고 국민 여러분께 밝힙니다.
김대중이‘그토록 어처구니없는 대북 정책을 그토록 오랫동안 일관되게 잘못 추진한’근본 이유는 노벨평화상에 대한 지독한 노욕(老慾) 때문이었습니다.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목적으로 국정원을 동원하여 해외공작을 진행하는 한편, 김정일에게는 약 2조원에 달하는 뇌물을 제공하였습니다.
먼저, 김대중 정권이 국정원을 동원하여 벌인 노벨상 공작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김대중의 노벨상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최규선 게이트의 녹취록과 노벨상 공작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습니다. 최규선이 공개한‘블루카펫 프로젝트’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그 보고서가 실제로 거의 그대로 실행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규선과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을 전담한 김한정이라는 인물은 둘 다 유종근 전남지사와 가까운 사이로, 이미 이전에 함께 이 일을 추진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대중의 노골적인 노벨상 욕심은 그의 첫 인사에서도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1998년 2월, 김대중은 초대 의전비서관으로 권영민 주(駐)노르웨이 대사를 내정했다가 일주일 만에 교체하는 해프닝을 벌였습니다. 김대중은 노벨상을 겨냥하고 권영민 대사를 의전수석에 내정했으나, 그가 김영삼 정권의 대사로 재임 중에 DJ의 노벨상 수상을 방해한 사실이 확인되자 곧바로 낙마시켰던 것입니다.
국정원의 노벨상 공작
국정원이 노벨평화상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국정원 해외공작국(현재 2국) 동구과 북구팀의 주된 임무는 노벨상에 관한 업무입니다. 문민정부 시절에도 YS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지만 수상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에 DJ의 수상 저지에 주력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초대 국가정보원장이었던 이종찬씨는 부임 초부터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 공작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저의 짐작으로는, 정치적 야심이 대단했던 이종찬 원장이 김대중으로부터 환심을 사서 정권을 이양받기 위해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주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2002년 12월「일요신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원장은 YS 정권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활동했던 최종O(정규 13기) 말레이시아 참사를 소환, 조사하였습니다. 최 참사는 1995년, 노벨상 활동을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최OO 주(駐)노르웨이 대사를 소환 조치하기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한국과 노르웨이는 한때 불편한 외교관계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1998년 8월, 이종찬 원장은 비서실 산하에 대외협력보좌관실이라는 부서를 신설하고 김대중의 공보비서 출신인 김한정이라는 인물을 특별 채용하였습니다. 김한정은 이 원장에게 직보(直報)하면서 비밀리에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최규선 게이트에서 마이클 잭슨 공연 유치와 관련하여 국정원의 K박사로 거론되었던 자가 바로 김한정입니다.
그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초청, 휴전선에서‘평화의 음악회’개최를 추진했는가 하면, 마이클 잭슨의 서울 공연에도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또한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민주투사로서의 인생 역정, 외환위기 극복 등을 홍보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책자를 발간하고 국제 세미나를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현지에서는 공금을 들여 김대중의 인생 역정을 미화(美化)한 김대중 전기(傳記)를 북구어로 번역해 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국정원의 스웨덴 파견관 이병O(정규 11기) 참사는 1999년 초 계급정년으로 옷을 벗게 되자 이러한 비리를 폭로하겠다며 이 원장을 협박하기도 하였습니다.
김한정은 또한 김대중의 국제적인 신인도를 높이기 위해 넬슨 만델라를 방한 초청하려고 했으나 만델라가 거액을 요구하는 바람에 불발로 그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99년 초, 북구와 유럽에 출장을 갔다 오는 등 정열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국정원에서의 그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중단되었습니다. 1999년 5월 말, 이종찬 원장이 갑자기 옷을 벗었기 때문입니다. 후임 천용택 원장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김한정의 노벨상 공작 활동에 거부감을 표시하면서 부임 일주일 만에 김한정을 퇴사시켰습니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로 돌아간 김한정은 사업을 계속 진행시킨 결과, 1999년 7월 김대중에게‘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안겼습니다. 그리고 5개월 후인 1999년 12월, 김한정은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파격적으로 영전되어 현재까지 김대중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김한정이란 인물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는 김대중의 최측근 심복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국 언론재단에서 운영하는 한국종합뉴스데이터시스템(KINDS)에서 검색하여 몇 가지 기사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일보 2002년 8월 26일자 기사에 의하면, 김한정은 김홍업에게 면회를 가서 필요한 물품을 전달해 준다고 합니다.
한국일보 2002년 2월 25일자 기사에 의하면, 김한정은 한화갑 고문에게 전화를 걸어 박지원 특보의 재기용에 대해 설명했다고 합니다.
중앙일보 2002년 1월 25일자 기사에 의하면, 김한정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자유롭게 의사를 개진하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월간중앙 2000년 3월호 기사에 의하면, 박지원씨가 박선숙 공보비서와 함께 김한정을 가장 아낀다고 합니다. 이희호는 김한정을 가리켜‘배앓이 않고 얻은 아들’이라고 말할 정도로 각별한 신임을 표시한다고 합니다. 김한정의 아내는 이희호와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합니다.
김한정은 경남 함안 출신으로 서울의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서울대 국제경제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대학 재학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적이 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 1992년 대선까지 김대중의 공보비서로 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와대의 노벨상 수상 공작 지휘
계속하여 2000년, 김한정이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계속 재임하면서 벌인 노벨상 공작의 주요 내용을 설명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한정은 박경태 주(駐)노르웨이 대사, 김남O 주(駐)노르웨이 국정원 파견관(정규 23기), 박종O 주(駐)스웨덴 파견관(정규 24기), 그리고 국정원1국 동구과 북구팀 박노O 팀장(정규 17기)에게 직접 지시하면서 공작을 진행하였습니다.
김한정은 이 공작의 일환으로 노벨상위원회 부위원장이자 5인 심사위원 중의 한 명인 노르웨이의 스톨셋 주교를 비밀리에 방한 초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스톨셋 주교는 김대중의 노벨상 시상식에서 안내를 맡았던 사람입니다.
또한 김한정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동티모르의 라모스 호르타 외무장관에게 거액을 제공하고 김대중의 노벨상 추천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라모스 호르타 장관은 김대중의 노벨상 시상식에 초대된 사람입니다. 김대중이 그동안 동티모르에 경제적인 지원과 더불어 상록수 부대를 파견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표시한 이유도 노벨상을 받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한편, 김한정은 스웨덴과 남아공에 해외홍보관(弘報官)을 신설, 파견하여 현지에서 해외홍보에 주력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스웨덴에 홍보관을 파견한 이유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일 터이지만, 남아공에 홍보관을 신설한 이유는 그곳에는 만델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간, 이 정권은‘홍보공화국’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을 정도로 해외홍보에 치중했는데, 그 이유는 모두 노벨상 때문이었습니다.
2000년 8월, 김한정은 노벨상 결정에 막후 영향력이 있는 분데빅 노르웨이 전 총리와 저명 음악인 등 3명을 극비리에 방한 초청하였습니다. 이들 일행은 국정원 해외공작국 박노O 북구팀장에 의해 비밀리에 제1차 남북이산가족상봉 행사장으로 안내되었습니다. 그들은 감격적인 남북이산가족상봉 장면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목격하고, 김대중을 예방한 후 노르웨이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이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노르웨이의 라프토재단은 김대중에게 라프토 인권상을 수여하였고, 이어서 노벨상위원회도 김대중에게 노벨평화상 수상을 결정했습니다. 분데빅 전 총리는 2002년 1월 두 번째로 노르웨이 총리가 된 후 또다시 방한하여 김대중의 극진한 환대를 받은 바 있습니다.
김한정의 이러한 공작활동을 보조한 자로 조준오라는 인물도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전 헌법재판관 조승형의 조카로서, 김한정과 같은 시기에 이종찬 원장에 의해 특별 채용되어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함께 근무했습니다. 그는 1994년 국정원의 공개채용시험에서 낙방한 적이 있는 사람이지만, 1998년 조승형의 부탁으로 이종찬 원장이 특채하였습니다.
조준오는 김한정의 노벨상 공작을 보조하다가 2000년 8월 국정원을 퇴사하였으며, 현재는 아시아나 항공사에서 부기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김한정이 국정원을 떠난 이후에도 2001년까지 김한정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청와대를 자주 사칭하다가 경찰청 조사과(사직동팀)의 내사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국정원에서 노벨상 공작은 흔히‘S’공작 또는‘ NP Project’로 일컬어졌는데,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동구과 박노O 팀장과 김남O 노르웨이 파견관, 박종O 스웨던 파견관이 실무를 맡았습니다. 이러한 공작은 해외공작국(1국)의 최조O 국장(정규 6기, 외대)과 이영O 국장(정규 9기, 육사 26기) 재임기간 중에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공작을 지휘했던 최조O 국장과 이영O 국장은 그 후 각각 주 쿠웨이트와 핀란드 대사로 영전되어 나갔습니다. 이영O 대사는 2001년 4월 1국장에 부임한 지 8개월 만에 박경O 단장을 승진시키기 위해 해임되었기에 특히 입을 막아야 할 필요가 더 컸을지도 모릅니다.
참고로, YS 정권에서 안기부 출신이 대사로 영전되어 나간 것은 이병호 차장이 말레이시아 대사로 나간 것이 유일한 예입니다. 박노O 팀장(정규 17기)은 그 후 동기 가운데 선두주자로 동구과장으로 승진하였고, 현재는 서구과장으로 재임하고 있습니다.
김한정은 1998년 미국 뉴저지주의 럿거스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귀국할 당시에는 전세집도 구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이종찬 원장은 그를 가락동에 있는 국정원 안가(安家) 아파트에서 살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너무나 이례적인 특별한 대우였습니다. 지금 김한정은 집을 두 채 이상이나 장만했을 뿐만 아니라 100억 원대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청와대의 모든 돈줄을 그가 쥐고 있다고도 합니다.
김대중의 반역적인 대북 뒷거래 실상
이어서 김대중이 노벨상을 수상할 목적으로 저지른 민족에 대한 반역 행위를 계속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내용은 신뢰할 수 있는 출처로부터 얻은 첩보에 근거한 것이지만 사실 여부를 모두 검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혀 둡니다.)
1999년, 외환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한 김대중은 자신의 업적과 경륜을 해외에 적극 홍보하면서 노벨상 수상 분위기 조성에 진력했습니다. 그 해 7월, 김대중은‘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노벨상 사냥에 나섰습니다. 역대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수상자 11명 가운데 6명이 노벨상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김대중은 이제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돌파구만 마련할 수 있다면 노벨상을 목에 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입니다. 김대중과 김정일 간의 은밀한 뇌물 뒷거래는 이러한 배경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1999년 말, 온 세상이 새천년의 기대에 한창 들떠 있을 즈음 김대중과 김정일은 극비리에 뇌물 뒷거래 협상을 마무리지었습니다. 김대중이 북한에 제공하기로 한 뒷돈의 규모는 미화(美貨)로 15억 달러입니다. 인류가 뇌물이라는 개념을 발견한 이후 최고의 뇌물 액수이자 앞으로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기록일 것입니다.
현대에서 이 뒷돈의 대부분을 대었습니다. 지난 번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이 제기한 현대상선의 4천억 원은 이 돈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현대상선 대출금 일부가 남북정상회담 선금으로 건너갔고, 뇌물 잔금은 대부분 2000년 9월에서 12월 사이에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000년 3월과 6월에 벌어졌던 현대의 왕자의 난은 정주영이 이 돈을 대기 위해 그룹 전체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시도였을 것입니다.
이 돈은 1천만 원권 수표 형태로 국정원에 넘겨졌고, 국정원은 주로 외교행낭을 이용하여 독일과 프랑스 등 6개 지부를 통해 이 돈을 해외로 빼돌렸습니다. 행낭의 책임자는 처음에는 최조O 국장이었다가 2000년 9월경부터는 박경O 단장으로 바뀌었고, 실무자는 고강O 사무관이었습니다.
박경O 단장(정규11기, 목포 문태고)은 2001년 4월, 이 정권에서 최단기간 내에 국장으로 승진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던 인물입니다. 박지원의 문태고 후배로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알려져 있는 그는 국장이 된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진급에 필요한 최소 연한을 채우지 못해 이사관(2급)으로 있다고 합니다. 박 국장의 이례적인 승진은 당시「시사저널」에 기사화되기도 했습니다.
고강O 사무관(9급 출신, 목포 문태고)도 그 후 서기관 팀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국정원에서 행낭 담당자가 승진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해외로 빠져나간 이 돈은 현지에서 주로 유로화로 환전되어 북쪽으로 전달되고, 수표는 다시 국내로 반입되어 국내 은행에서 결제되었다고 합니다. 해외에서 유로화로 환전하는 일과 수표를 재반입하는 작업에는 우리나라의 유로화 책임자가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김대중·정주영·김정일이 직접 관여했을 것이며, 이들은 각각 김한정·김정남·정몽헌을 대리인으로 내세웠을 것입니다. 박지원·임동원·이기호 등 지금까지 김대중의 옆을 지키고 있는 인사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청와대를 떠났다가도 다시 그 밑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김대중은 대북 커넥션에 관련된 인사들은 배신하지 못하도록 끝까지 그의 주위에 묶어두고 있는 것입니다.
김대중의 분신인 김한정 제1부속실장과 김정일의 아들인 김정남은 이 일을 협의하기 위해 일본 등지에서 여러 차례 극비 접촉을 하였을 것입니다. 김한정과 김정남은 2000년 4월 10일 경, 남북정상회담 발표를 전후하여 일본에서 만나 남북 뒷거래 협상을 최종 마무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이들은 2000년 10월과 12월, 노벨상 수상을 전후하여 일본에서 만나 노벨상 단독수상 문제 등을 협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2001년 5월 초, 김정남이 일본에 밀입국하다가 체포되었을 당시에도 김한정과 김정남은 일본에서 접촉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000년 들어, 김대중과 김정일은 뒷돈거래 협상을 대충 일단락 짓고 각본대로 본격적인 국내외 분위기 조성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김대중은 1999년 12월 말, 부임한 지 6개월밖에 안 된 천용택을 경질하고 임동원을 국정원장 자리에 앉혔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당시 천용택은 자기 부인(김아미)이 옷로비 사건에 연루된 것을 무마하려고 검찰 출입기자 몇 명을 국정원으로 초대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DJ의 대선자금 등 민감한 정보를 누설하는 촌극을 벌인데다, DJ를“김대중이가 …”라고 부른 게 그만 일주일 후에 밝혀져서 불경죄로 잘린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천용택은 역대 국정원장 중 자질이 가장 저열한 자였습니다. 그는 김대업 의인(?)과도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0년 1월, 김대중은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고, 총선 후 제1당이 되고 나면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겠다고 처음으로 운을 떼었습니다. 한달 뒤, 김대중은 일본 도쿄방송(TBS)과의 특별 인터뷰에서 김정일을“식견 있는 지도자”라고 치켜세워 세상을 어리둥절하게 했습니다.
같은 해 3월, 독일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대규모의 대북 경제지원을 주 내용으로 하는 충격적인‘베를린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당시 이러한 발표는 미국과 사전 교감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격렬한 분노를 샀었습니다.
이러한 국내외 분위기 조성 작업과 함께 김대중과 김정일은 2000년 1월부터 중국 등지에서 남북간 비밀회담을 추진하였습니다.
남쪽에서는 임동원 국정원장이 주도했고, 김보현 전략국장이 실무를 맡았으며, 서훈 경협1과장이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김보현 전략국장과 서훈 과장은 남북정상회담 후 각각 신설된 3차장과 남북회담조정관(이사관)으로 승진하여 지금도 현직에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김용순 대남비서가 주도하고, 임동옥 아태 제1부위원장이 실무를 맡고, 권민(권호웅) 참사가 심부름을 하였습니다.(*권민 참사에 대해서는 제 2부 제 8장‘안에서 본 국민의 정부 I’<남북회담 현장의 이모저모> 참조.)
남북은 각각 박지원과 송호경을 얼굴마담으로 기용하였습니다. 그리고 2000년 4 ‧ 13 총선 직전, 김대중은 극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을 발표하였습니다. 당초 남북은 일요일 오후에 발표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김대중은 홍보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월요일 아침으로 발표 시점을 늦추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정권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의도는 자명합니다. 단기적으로는 4 ‧ 13 총선에서 민주당을 제1당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고, 중기적으로는 노벨평화상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대북관계 개선을 지렛대로 삼아 새천년민주당의 호남당의 한계를 탈피하고, 궁극적으로는 남북을 포함한 정계개편을 획책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단기와 장기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노벨평화상을 받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맺음말
여러분께서는 아마도 회칠한 가면 뒤에 숨겨진 김대중의 악마적인 모습을 믿지 않으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적과 싸우기 위한 전략물자를 수송해야 할 국정원의 행낭이 적의 군자금을 보급하는 통로로 이용되었다는 주장도 믿기 어려울 줄 압니다.
참고로, 김정일은 김대중의 뇌물을 받아 고폭장치 등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핵심 물자를 파기스탄, 카자흐스탄, 프랑스 등지에서 구입했습니다. 김정일은 또한 이 돈으로 카자흐스탄으로부터 40대의 신예 미그기를 도입하였고, 러시아로부터는 잠수함과 탱크 등 첨단무기를 구입하였습니다.(*이 지면을 빌려 지난 서해교전시 장렬하게 전사한 우리 해군장병들의 명복을 빕니다.)
최근 벌어진 몇 가지 일들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북한이 작년부터 달러화 유통을 금지시키고 결제수단을 유로화로 변경할 수 있었던 것도 뇌물로 받은 유로화 덕택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북한은 그 동안 약세를 면치 못하던 유로화에 대해(2000년 8월 30% 절하) 우리보다도 훨씬 더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 왔습니다. 2000년도에 북한에 넘겨진 15억 달러 상당의 유로화는 지금 현재의 환율로는 20억 달러의 가치로 평가절상되어 있습니다.
현대에 지원되었던 34조원의 공적자금 중에서 현재 2조원이 회수 불가능한 것으로 최근 판명되었다고 합니다. 현대상선은 주력 알짜배기 업종인 자동차 운반선 사업을 15억 달러에 매각하였습니다. 김대중이 북한에 송금한 금액과 이러한 액수가 일치하는 것을 그냥 우연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김대중은 국민의 혈세로 이루어진 공적자금을 현대에 지원하면서 현대로부터 리베이트를 챙긴 것입니다. 김대중은 리베이트의 일부를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었겠지만, 상당 부분을 북한에 뇌물로 바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현대는 정부로부터 공적자금을 지원받아 일부를 북한에 전달하고, 그 대가로 금강산과 개성공단 독점사업권을 받은 것입니다. 북한은 현금을 챙기고 위장된 평화 생색을 내줌으로써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받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북한의 대남 일꾼들이 한결같이“현대는 절대로 망하게 하지 않겠다”고 외치고 있는 배경에는 이러한 커넥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우리 사회의 통념을 깨고 김대중이 김우중의 대우그룹을 해체한 것과, 김정일이“김우중이 가장 악질적이다”라고 언급한 것은 같은 맥락의 일일 것입니다. 북한의 소위 대화일꾼들이 우리의 경제원조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기회 있을 때마다“우리가 더 많이 주었다”고 강변하는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김대중이 목에 걸고 자랑스러워한 노벨상은 실로 북한 동포들의 피눈물과 절규, 그리고 우리 국민의 혈세가 어우러져 응결된 결정체입니다. 지금 김대중은 잔설처럼 남아 있는 권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과거의 추악한 범죄 흔적을 지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지는 못합니다.
저는 지난 2년여 간 찬바람 부는 현실 속에서 어렵게나마 국가정보원 직원으로서의 명예를 걸고 외롭게 이러한 일들을 추적해 왔습니다. 비록 저는 이 모든 일들을 전부 검증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제가 얻은 정보는 진실에 가깝다고 확신합니다. 예전에 어느 분은“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친 적이 있습니다. 저는“깨어 있는 민족이라야 자유와 번영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외치고 싶습니다.
앞으로 실체적(實體的) 진실을 확인하는 작업은 국민 여러분께 맡기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2003년 1월 30일
전 국정원 직원 김기삼 드림
*추신: 정보공개에 부쳐
사랑하는 국정원 동료 및 선후배 여러분!
저는 오늘 전직 국정원 직원으로서 우리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보안(保安)을 위배하는 일을 저지르기로 결심했습니다. 보안을 지키는 일보다는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더욱 우선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2년여 전, 회사를 나온 저는 이 정권의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기 위해 수많은 번민의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사실들을 알아냈고, 이제 국민과 함께 이 정보를 공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오늘 저는 이러한 저의 결심에 대해 여러분의 이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국정원 동료 및 선후배 여러분,
저는 지난 5년간 여러분들이 당한, 그리고 앞으로 5년간 더 당할지도 모를 말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들을 너무나도 잘 이해합니다. 2년여 전에 저는‘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겠다’며 퇴사를 결심했지만, 그때의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신이 없습니다.
저는 비통한 마음을 참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인고의 세월을 참고 온 보람이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민족의 운명은 여러분들의 어깨 위에 달려 있습니다. 부디 용기를 가지시고 끝까지 살아남아 민족의 반역자들을 처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이 글로 인해 실명이 거론된 분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염치없지만 양해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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