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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 프로젝트(연재중)/12. 자네 출세했네

12. “자네 출세했네”

          권영민 대사는 지난 1998 1청와대 의전수석으로 낙점되었다가 1 주일만에 낙마하는 바람에 유명세를 탄 사람이다. 그 일이 있은 지 10년 후인 2008, 그는  “자네 출세했네”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그의 외교관 인생과 최규하 대통령과 홍기 여사와의 인연을 잔잔하게 추억하는 내용이다. 최규하 대통령의 국무총리 시절에 권 대사는 그의 보좌관을 지냈다고 한다. 책 제목도 최 대통령이 자신에게 한 말을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책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바로 노벨평화상과 관련한 부분이다. 아래 설명은 그의 책에서 인용한 것인데,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가 노벨평화상과 처음 엮이게 된 것은, 1994년 아틀란타 총영사로 부임한 이후다. 당시 한반도의 핵위기가 한창 고조되자 카터 전 대통령이 갑자기 방북길에 나섰다. 아틀란타 총영사로서 그도 본의 아니게 카터의 방북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 1994 6월 초, 지역의 어느 유지에게서 카터의 방북 소식을 전해 듣고는,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카터의 최측근 크리스모어를 찾아 갔다. 그가 카터의 방북 일정을 문의하자, 크리스모어는 “나도 잘 모른다. 확인해 줄 수 없다.”며 매몰차게 거절했다. 면전에서 크게 무안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틀 후 크리스모어가 다시 전화를 걸어 와 몇가지 부탁을 요청해 왔다“방북하기 전에 한국 대통령과의 면담, 관계 장관들의 브리핑, 판문점 통과 편의 등을 제공해 줄 것과, 한승수 대사와의 면담을 주선해  달라.” 등이었다. 권 총영사는 크리스모어를 다시 만나, 그의 무례한 요구와 처사에 대해 젊잖게 따졌다. 그는『카터가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북한 핵문제를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궁극적으로는 노벨평화상을 타기 위한 속셈을 가지고 있다.』고 간파했다. 어쨋거나, 카터는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은 후 휴전선을 넘어 방북길에 올랐다.[1]

          결과적으로 카터의 방북은 대성공이었다. 그는 김일성과 대동강 뱃놀이 회담을 마치고 북핵 해결을 위한 일괄타결안을 가지고 돌아 왔다. 김일성은 『미국이 경수로를 제공하면 핵확산금지조약에 다시 복귀할 것이며, 미국이 북한에 핵무기를 쓰지 않겠다는 보장을 하면 북한은 영구히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겠다. 』고 약속했다.[2] 게다가 카터는기대하지 않았던 “깜짝 선물”까지 챙겨 가지고 왔다. 바로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보름 후,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무산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후 그는 애틀란타 근무를 마치고 본부 귀대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5 2, 갑자기 노르웨이 대사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노르웨이 대사로 나가게 된 이유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주위에 물어봐도 속시원히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간 곰곰히 고민해 보았다. 갑자기 그의 뇌리를 번쩍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노벨평화상”이었다. 그렇다. 노르웨이는 노벨평화상의 나라였다. 그리고 그때 김영삼 정권은 노벨상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문민정권이 끝나고 난 후, 동아일보는  “잃어버린 5, 칼국수에서 IMF까지”라는 두 권짜리 책을 출판했다. 그 책은 “YS 문민정부 1800일의 비화” 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문민정부 시절 벌어졌던 여러 가지 사건의 심층 취재한 연재물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이 책에는 YS 시절에 노벨평화상과 얽힌 일화가 보다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바로 1998 7 28일 동아일보가 보도한 내용이다. 다음은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94년 10월 21일 북한과 미국의 제네바 기본합의서 서명으로 북한 핵문제가 일단락되면서...노벨평화상을 추진했던 사람들은 ...한반도 긴장완화의 물꼬가 트였다고 보고 로비를 본격화 해야 할 적기라고 판단했단 것이다. 80년대 노르웨이에서 3년간 근무하고 오슬로대에서 2년 동안 연수한 적이 있는 안기부 파견관 C씨가 선발대로 뽑혔다. 노르웨이어를 할 수 있는 데다 유력인사들과 친분이 있다는 점이 고려된 것이다. 93 10월 노르웨이 대사관에 부임한 C씨는 김 대통령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3]

          이 책은 또한 C씨가 노벨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현지 대사와 심각한 갈등을 겪은 내용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C씨는 노벨평화상 로비와 관련해 외교부에서 나간 외교관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외무부의 한 고위관리는 “안기부 파견관이 노르웨이 주재 C대사가 노벨평화상과 관련한 활동을 소홀히 한다는 정보보고를 자주 한다는 얘기가 외무부에 파다했다.”고 회고했다. [4]

          『이와 관련해, YS의 노벨평화상을 추진하던 사람들은 정보판단력과 로비력이 뛰어난 안기부 간부 출신을 노르웨이 대사로 임명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한승주 외무부장관은 이러한 압력에 반발하면서 “대사를 조기에 바꾸면 역효과가 난다.”며 버텼다. 94 12월 한 장관이 물러나고 공로명 장관이 취임하고 난 후, 95 1 C대사는 부임 1 1개월만에 본부로 소환되었다. 당시 노르웨이 정부는 한국 정부의 대사 조기 소환에 공식 항의했다.[5]

          전후 사정을 보면대사의 조기 소환은 문책성 인사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그 후 C대사나 C씨 공히 이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하기를 거부했다.

          전대사는 “노벨평화상에 얽힌 소문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와서 무슨 얘기를 하겠느냐.”며 자신과 관련된 상황에 증언하기를 꺼렸다. C씨는 “내가 노르웨이 대사관에 다시 근무하게 된 것은 지역전문가로서 간 것일 뿐 노벨평화상 로비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6]

이와 같은 대사의 전격 소환은 노르웨이와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보통 대사의 임기를 3년으로 하는 게 외교 관행인데도 정부가 이를 무시하고 대사를 소환하자 노르웨이 정부는 무시 당했다고 생각해서인지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습니다.[7]

리한 대사 소환은 2002년 월드컵 유치 과정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다음은 동 기사가 전하는 정몽준 축구협회 회장의 회고.

 2002년 월드컵 유치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노르웨이 집행위원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대사 소환을 이유로 오히려 항의했어요. 노르웨이 정부는 대사 교체에 대해 외교적으로 모욕을 당했다는 분위기였습니다. 한표가 아쉬운 마당에 난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8]

          이 책에서 C대사라고 익명으로 처리한 사람은 최대화 대사였다. 그는 김대중 정권 초기 주 벨기에 유럽연합대사로 나갔다. 안기부의 C씨라고 익명으로 거론된 인사는 최종흡 파견관이었다. 그는 국정원 내에서 유능하고 민완한 정보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도 이 일이 있은 후 러시아 파견관으로 잠시 전근되었다가 노벨상을 전담하는 해외공작국 동구과장으로 컴백한 후, 말레이지아 파견관으로 나갔다.  

          그는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노르웨이에서 있었던 일과 관련하여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당시 그는 갑자기 본부의 소환 명령을 받았다. 이종찬 국정원장의 지시로, YS 시절 DJ의 노벨평화상 수여 방해 활동을 조사하기 위해 감찰조사가 벌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인테넷 좌파 언론인 프레시안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안기부장 이종찬은 내부 감찰을 지시했다. 그리고 조사 결과 안기부가 조직적이고도 치밀하게 공작을 주도했음이 밝혀졌다. 해외파견관, 현지 공관원, 교수, 언론인, 정치인들을 동원한 사실도 드러났다. 그중에는 유명 인사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종찬은 고민했다. 평소 신뢰하던 대외협력보좌관 김한정을 불렀다. 그는 김대중 비서를 지낸 인물이었다.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은가?" 김한정은 이종찬이 건넨 명단을 유심히 살펴보며 입을 뗐다. "과거 일입니다. 덮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치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김 대통령의 의지도 헤아려야 합니다. 국가적으로도 창피한 일입니다." 이종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벨상 수상 방해 공작은 이렇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9]

          프레시안의 이와 같은 보도는 과장된 측면이 있고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어 보인다. 이종찬과 김한정의 노벨상 공작 연루의혹을 의식해서인지, 이들을 미화하고 변호하려는 의도가 역력히 보인다. 하지만,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하기에 충분한 자료다. DJ의 노벨상 수상 공작이 정권 초부터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 이종찬 국정원장도 언론 인터뷰에서 비슷한 증언을 한 적이 있다. 

YS정권 당시 안기부가 DJ의 노벨평화상 수상 방해공작을 폈다는 얘기가 있다. 사실인가.

▲사실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이 노벨평화상을 받으려했다. 집권 당시 외무부 관계자는 노벨위원회쪽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일정 역할을 했다. 그런데 노벨위원회에서는 DJ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안기부가 DJ가 노벨상을 타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폈다. 당시 안기부는 노벨위원회 관계자들에게 ‘DJ는 나쁜 사람이다’라는 식의 정체불명의 투서를 보내곤 했다. 98년 국정원장으로 취임한 후 방해공작과 관련한 서류들을 확인했다. 감찰실을 통해 이런 역할을 한 사람들을 조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인사상의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그들도 윗선의 지시에 따랐을 테니까.[10]

          감찰 조사 후, 최종흡 참사는 김대중 정부 내내 정보학교에서 한직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정권 말엽에 가서야 겨우 대북공작국으로 현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남다른 정보센스를 발휘하여 노무현 정부에서 대북공작국장을 지내고 퇴사한 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차장으로 기용되었다. 그는 이명박 정권 출범과 함께 권력 핵심으로 등장한 이른바 대구 대륜고 사단 중의 한 명이었던 것이다. MB의 정치적 멘토라고 불렸던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대륜고 사단의 좌장이었다. 대륜고 사단은, 영포군단과 함께 이명박 정권 초기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었다.

          권영민 애틀란타 총영사가 노르웨이 대사로 발령된 배경에는 이와 같이 안기부와 외무부 간의 물밑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권 대사는 애틀란트 총영사 시절 마틴 루터 킹 인권재단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덕분에 YS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비폭력 평화상을 수상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YS는 이 상의 18번째 주인공이 되었다. YS이전에  그 상을 탔던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YS가 상을 받고 유난히 기뻐했던 이유가 보다 명확해진다. 지미 카터 대통령,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투투 주교, 고르바쵸프 대통령,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 등 쟁쟁한 거물들이었다. 청와대가 노르웨이 대사를 선택하면서 이러한 공적을 높이 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권영민 대사는 자신의 노르웨이 부임이 노벨평화상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나서 머리 속이 복잡해 졌다. 노르웨이로 부임하기 며칠 전, 그는 연례 공관장 회의에서 어느 선배 대사로부터, 3 김 중에서 한 명인 김대중 씨가 노벨평화상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 선배대사는『이 문제는 잘못하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조심하라. 』고 조언해 줬다. 그는 부임인사를 다니다 노르웨이로 가게 된 배경을 소문으로 들을 수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도 노벨평화상에 관심이 많으며 노르웨이 현지에서 이에 대한 동향을 알아보라고 했다. 』는 것이다.[11]

          아뭏든, 권 대사가 노르웨이 대사로 재직 중에, 국내의 주간지에 YS의 노벨상 수상 노력에 대해 두 차례 보도가 났다. 주간 한겨레21과 주간동아였다. 권영민 씨는 그의 책에서 YS의 노벨평화상 추진과 관련 자신의 역할에 대해, 한겨레21과 주간동아에 보도된 내용을 강한 어조로 반박했다. 어쩌면 이 일을 해명하기 위해 회고록을 출판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당사자로서는 무척 억울했을 것이다. 그는 조목조목 보도내용을 반박하면서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한겨레21이나 주간동아의 보도내용은 모든 팩트가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는 책에서 두 페이지나 할애하여 필자가 주장했던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 허구인지 사실인지 진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전후 사정을 잘 알만한 위치에 있던 분이 그렇게 말한 것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12]

          어쨋거나 권영민 대사는 3 년간 노르웨이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본부로 귀임했다. 앞에서 소개한대로 그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초대 의전수석으로 내정되었다. 김대중이 자신의 노벨상을 의식하고 임명한 것이 틀림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의전수석 내정은 일주일 만에 취소되고 말았다. 그가 노르웨이에서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방해했다는 진정이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권 대사는 이러한 세간의 소문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는『내가 한 일이라고는 YS가 수상가능성이 있는지 알아보는 정도였고, DJ를 험담한 일은 없다. 』고 주장했다.[13]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권 내정자가 노르웨이대사로 있을 때 김 당선자가 노벨평화상을 받지 못하도록 움직였다거나 애틀랜타 총영사 시절 김 당선자와 카터센터간의 교류에 제동을 걸었다는 등의 얘기들이 보고된 것으로 안다...."이중에서도「그가 노르웨이 대사로 있을 당시 김당선자가 노벨평화상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공작을 했다」느니, 96년 주애틀랜타 총영사시절 김당선자가 카터 전 미대통령을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는 얘기들이 접수돼 결정적으로 제동이 걸렸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14]

몇 달 후 동아일보도 비슷한 논조로 보도했다.

     권 대사가 의전비서관에 내정된 것은 부지런하고 능력있는 외교관이라는 평가를 받은데다 김대중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권대사는 애틀랜타총영사 시절 아태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애틀랜타를 두차례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을 잘 모신 적이 있다. 그러나 권대사의 의전비서관 내정 발표가 난 뒤 문제가 생겼다. 국민회의 고위 관계자의 설명“권대사는 애틀랜타를 방문한 김대통령을 환대하는 등 열심히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권대사가 노르웨이 대사로 있으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홍보하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방해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어요. 전말을 조사해보니 명확한 물증은 없었지만 정황상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는 결론이 났어요. 공식발표했던 내정인사를 바꾸는 것이 부담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15]



[1] 권영민, "자네출세했네"

[2] Ibid.

[3] 동아일보사, "칼국수에서 IMF까지"

[4] Ibid.

[5] Ibid

[6] Ibid.

[7] 동아일보, 1998.7.28. "YS 노벨평화상 추진"

[8] Ibid.

[9] 프레시안, 2012.5.10., DJ “대한민국의 최대 암적 존재는 검찰

[10] 일요신문, 2002. 10.27., "이종찬 전 국정원장 단독인터뷰"

[11]  권영민, "자네출세했네"

[12] Ibid.

[13] Ibid.

[14] 조선일보, 1998.2.28., "권영민씨 DJ 방해전력 드러나"

[15] 동아일보, 1998.7.28. "YS 노벨평화상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