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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 프로젝트(연재중)/8. 장막 뒤의 연출가

8. 장막 뒤의 연출가

20031 30, 필자가 "회칠한 가면, 악마의 초상"이라는 글에서 김한정이라는 인물을 세상에 처음 소개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에서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언론에 보도된 적도 거의 없었다. 수년 동안 청와대제1부속실장이라는 핵심적인 자리에 있었지만, 청와대 출입기자들도 그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철저하게 베일에 싸인 미스테리의 인물이었다. 장막 뒤의 사람이었다.

김한정, 그는 과연 누구인가? 먼저, 그의 삶의 궤적부터 살펴보자.

김한정은 경상남도 함안 출신으로, 휘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82학년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당시 많은 학생들이 그런 것처럼, 대학 재학 중에 열성적인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대학교 마지막 해인 1985 11 4, 14 명의 학생들과 함께 서울 소재 미 상공회의소 건물을 난입하여 점거하는 데 참여했다. 사건으로, 그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수감되었다가 1987년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의 운동권 경력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욱 치열하고 화려(?)했던 것 같다. 한겨레 신문이 1990 10 9일 보도한 보안사 사찰대상 서울대생 387명의 명단에서도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보안사가 사찰할 정도로 심각하게 좌익활동을 했다는 반증이다.

          감옥에서 나온 후, 그의 인생은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외가쪽으로 5촌 당숙이던 설훈 의원의 소개로 동교동에 막내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2003년 월간중앙은 김한정의 DJ와 첫 인연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공보비서로 처음 일을 시작했지요. DJ는 처음 내게 신문 스크랩을 시켰어요. 다른 일은 안 시키고 그 일만 6개월이나 시키더군요. 내가 이 일을 하려고 비서가 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 다음에는 DJ의 구술을 받았어요. 연설문이나 논평을 받아 적은 거죠. 그 일은 원래 남궁진 전 장관이 동교동 비서 시절 했던 일인데 내가 물려받았죠. 제가 구술을 담당하면서 워드를 사용하기 시작했죠. 구술한 내용을 금방 쳐서 또 재빠르게 수정하고 아주 예쁘게 편집해 문서를 갖다 드리자 굉장히 신기해 하시는 겁니다.”』[1]

          그는 그렇게 DJ의 공보비서를 4년간 했다. 다음은 월간조선이 전한 내용. 

            DJ 정권에서 2 인자 역할을 했던 한 원로 정치인은 김 실장에 대해 「연설문을 잘 만들던 젊은이」로 기억했다. "동교동에 어느 날부터 젊은 친구 하나가 왔다갔다 합디다. 처음에는 설훈이 옆에 있는가 했더니 나중에 보니 선생님 옆에 있는 것 아니겠소. 그 친구가 청와대에서 우리 대통령님을 모시는 김한정이라는 친구요. 그 젊은이는 선생님의 구술과 연설문을 만들어 내는데 선생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하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퇴임한 후에도 그 친구를 비서관으로 계속 쓸 거요."』[2] 

          문맥으로 보아 이 말을 전한 원로 정치인은 권노갑 전 의원이다. 그는 이 당시 김대중과 결별한 상태였다. 2001년 말, 권노갑은 계속해서 터지는 케이트 사건의 책임소재를 놓고, DJ와 결별했다. 혼자 덮어쓰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렇게 됐. 그의 말에서 가시가 느껴지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그의 언급에는 DJ를 위해 자신의 전 인생을 바치고도 결국 배반당하고 만 자신의 처지와, 불과 몇년만에 DJ의 최측근으로 자리 잡은 어느 젊은이에 대한 회한과 비아냥이 함께 베어 있는 느낌이다. 

김한정은 DJ의 공보비서로서 확실한 신임을 받았던 것 같다. 김대중은 전라도 출신 보다는 경상도 출신이 그에게 확실히 충성하는 걸 좋아했다. 자신이 전국적으로 존경 받는 인물이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한정은 김대중의 이런 신임을 바탕으로 운동권 친구들을 DJ 캠프로 끌어들였다. 이것은 얼마가지 않아 대형 사고로 이어졌다.

1992 9, 14대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일 때, 국가안전기획부는 중부지역당 사건을 발표했다. 정형근씨가 대공수사국장을 할 때였다. 그 해 10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정우 법무장관은 중부지역당 사건과 관련 민주당의 의원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최락도의원(민주)=북한 고위 간첩 이선실일당이 17년간 암약하고도 하나도 붙잡히지 않고 북한으로 가버린데 대해 국가보위를 책임진 대통령은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

이정우 법무부장관: 북한 고위간첩 이선실이 10년간 남한에서 암약하면서 많은 사람을 포섭하려 기도했으며, 그 중 정치인도 포함돼 있어 관계기관에서 내사중이다. 그러나 오늘 현재로서는 특정정치인 관련사실을 보고받은 바 없다.』[3]

중부지역당 사건에서 안기부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선거 캠프에서 일하던 이근희라는 사람을 구속 수감했다. 그 후 이근희는 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되었다. 신문에 보도된 이근희의 간첩 혐의는 다음과 같다.

『이근희는 서울대 불문과3학년 재학 중이던 198610월 구국학생연맹 사건과 관련, 징역2·집행유예 4년 형을 받은 자로서, 90년 5월 당시 평민당 이상수의원 입법보조원으로 근무하다, 1991년 9월부터 김대중 민주당 공동대표의 비서 김모씨(30)의 소개로 김 대표의 국회 국방위 비서로 채용돼 근무하고 있음. 이씨는 91년 4월 하순 서울대에서 거행된 「김세진·이재호 추모집회」에서 황인욱을 만나 국회 정보를 제공하기로 약속하고 수차례 황과 접촉했음. 91 12월 하순 국회 국방위 입법조사관실에서 김대중 대표의 도장으로 문서 수령 대장에 날인한 뒤, 군사 2급비밀인 「1992 국방예산()개요」를 1부 복사, 황에게 전달했음.』[4]

위 기사에서 이근희를 김대중 후보에게 소개했다는 김 모씨가 바로 김한정이다. 안기부의 조사 결과, 기사에 나온 황인욱은 중부지역당 사건의 주범인 황인오의 친동생이며, 이근희는 약국을 하는 황인욱의 처를 통해 문제의 비밀자료를 북한으로 보낸 것으로 확인되었다. 김한정과 황인오, 이근희는 모두 같은 시기의 서울대 동문이다. 이들은 재학시절부터 학생운동을 같이한 이념의 동지 관계인 것으로 읽힌다. 이제까지 김한정 북한과 어떤 연계를 가졌는지 밝혀진 바는 없지만, 이 사건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1993 12DJ가 대선에서 패하고 난 후, DJ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런던으로 떠나자, 김한정은 미국 뉴저지 소재 럿거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럿거스 대학은 유종근 전 전북지사가 강의한 적이 있는 대학이다. 아마도 유 지사의 추천으로 간 것으로 보여진다. 김한정은 5 년간의 힘든 유학생활을 마치고, 1998년 초에 한국에 귀국했다. 박사학위를 끝내지 못한 급거 귀국이다. 대통령 곁으로 다시 복귀하고 싶었지만, 청와대는 이미 새로 들어온 참모들이 자리를 차지 하고 있어 들어갈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대신 그는 국정원을 선택하게 됐다. 다음은 그가 자신의 책에서 국정원에 입사 경위를 설명한 내용.

          1997년 말, 한국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대선 캠프가 꾸려져 있어서 나는 외각에서 지원하는 일을 했다.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역사적 광경을 감격적으로 지켜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논문을 마치려고 했으나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외환위기가 닥쳐 천정부지로 치솟은 환율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졌다. 그때 비서실에서 함께 일했던 배기선 선배가 이종찬 국가안전기획부장과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귀국을 결심했다.』[5]

          국정원 입사는 그에게 또 한번의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수배자로 쫒기던 처지에서 점령군이 되어 당당히 들어온 것이다. 그에게 그칠 것이 없었다. 이종찬 원장은 국정원 안가 아파트를 제공해 줄 정도로 각별히 그를 챙겼다. 1999 5월말 사직하기까지 약 1년간그는 정열적으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해외 출장도 10여 차례나 다녔다. 모든 일을 원장에게만 직보하면서 철저히 비밀스럽게 행동했다그와 이종찬 원장외에는 그가 무슨 일은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은 그를 “국장급 사무관이라고 비아냥했다.

          당시 필자가 김한정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 어깨 너머로 목격하기로는, 그는 판문점에서 국제적인 가수들을 초청하여 평화콘스트를 개최하는 일, 햇볕정책을 해외에 소개하기 위해 세미나를 여는 일, 김대중의 외환위기 극복 상황을 해외에 소개하는 일 등을 추진했다. 또한, 김대중이 세계적인 지도자와 노벨평화상 수상자와 나란히 반열에 설 수 있도록 하는 일에 공을 들였다. 오랫동안 넬슨 만델라를 방한 초청하려고 노력했는데, 만델라가 거액의 초청비를 요구하는 바람에 무산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국정원에서 추진한 가장 중요한 일은 김대중의 옥중서한을 스웨덴어로 출간하는 일이었다.

          월간조선은 대외협력보좌관실에서 김한정의 역할에 대해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1998년부터인가 판문점, 평양 등에서 평화 콘서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디어는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 조수미 씨가 평화 콘서트에 자주 등장했는데 섭외를 김 실장이 직접 했다. 해외에 머물고 있던 가수 서태지의 판문점 공연도 그가 기획했다. 서태지는 준비단계에서 한국에 들어올 때 비밀리에 들어오기도 했는데 출입국할 당시 국정원이 편의를 제공했다.

          김 실장은 김 대통령의 화보집도 발간했다. 김 대통령을 해외에 알리는 용도였다. 이런 사업들의 화두는 당연 「평화와 인권」이었다. 김 대통령의 전기가 북구어로 발간됐는데 그것도 그가 주도했다. 국제적인 세미나를 개최한 것도 그다. 여기에는 Y M 교수의 역할이 컸다. M 교수와 김 실장은 상호협력관계에 있었다. 둘은 해외에도 같이 나가곤 했다』 [6]

          기사에 나온 Y M교수는 연세대의 문정인 교수를 지칭한다. 그는 김한정과 함께 햇볕정책을 해외에 알리는 데 나팔수 노릇을 충실히 했다. 이점이 그가 김대중 노무현 양 정권에서 권력 주위에 어른거릴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그는 노무현 정권에서 초대 국정원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되기도 했었다. 김대중이 자시의 도서관을 연세대로 가져가기로 결정한 것도 이런 인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국정원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김한정은 2003년 월간중앙에서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물론 핵심을 벗어난 요설이자 거짓 진술이다.

          『국정원 시절 제가 맡았던 일은해외정보 수집김대통령의 해외 인맥 관리였습니다. IMF 환난때 해외 정보에 어두워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그래서 이종찬 원장의 아이디어로 대외협력보좌관실이 생긴 것입니다. 미국 월가의 정보 전문가 등을 통해 해외 경제정보를 수집하고 김대통령이 평생에 걸쳐 쌓은 해외 인맥들을 국가 자산으로 활용할 방법들을 강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국정원 홈페이지를 구축하는 일도 제가 제의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홈페이지가 있는데 우리 국정원이 홈페이지 못 가질 이유가 없었잖습니까. 이처럼 사실과 달리 무슨 엄청난 공작을 기획한 것처럼 소문이 나도는 것은 국가적 망신입니다. 더 자세히 해명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런 논의 자체가 국가의 위신에 치명적 타격을 입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7]

그는 또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도 물타기를 했다.

          제가 국정원에 있을 때 노벨상 수상을 위한 사전 공작을 했다는 K씨의 주장에 일일이 반박할 필요는 느끼지 않습니다. 두 가지 전제가 틀렸습니다. 제가 굉장히 중요한 일을 수행한 거물인 것처럼 묘사했는데, 저는 그런 인물이 못 됩니다. 그 사정을 아는 사람들한테는 정말 창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 노벨평화상은 로비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상이 아닙니다. 이 점은 노벨상 관계자도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 상식적으로 김대통령이 못 탈 상을 탄 것도 아닙니다. 』[8]

          그는 철저히 김대중의 그림자이기를 원했다. 마치 김대중의 분신인 것처럼 움직였다. 다음은 그를 잘 아는 어느 인사가 월간조선에 털어놓은 내용.

          『상당히 똑똑한 사람이다. 서울대 운동권 출신으로 기획력이 뛰어났다. 박지원 비서실장이 성실한 반면, 김한정 실장은 성실성과 머리를 겸비하고 있다. 박실장 앞에서도 자기 소리를 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김대통령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김대통령에 대한 충성심도 강하다. 운동권 출신이라 국정원에 있을 때 내부 직원들과 마찰이 있곤 했다. 아무튼 그는 운동권 출신으로서의 사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성격이 급한 게 흠이라면 흠이다.』[9]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자신이 일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김대중 후보의 공보비서관으로 4년여, 청와대 부속실장으로서 3년여, 퇴임후 비서관으로 2년여 등 거의 10년간 김대중의 최측근으로 일하면서도 한번도 자기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청와대 출입 기자들고 그가 누구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함께 일하는 청와대 직원들조차 그가 정확히 무슨 일은 하는지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어지는 월간조선의 증언 내용.

          『그는 보안의식이 철저한 사람입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도 힘들었죠. 그는 어떻게 하면 합법이고, 어떻게 하면 불법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가 될 만한 소지를 아예 없애버리죠. 그러면서도 자기가 기획한 일은 성사시킵니다.』[10]

          이러한 증언들은 왜 김대중이 자신의 가장 은밀한 임무를 수행할 사람으로 최규선을 버리고 김한정을 택하게 됐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김대중 뿐만 아니라 이희호도 김한정을 끔찍히 아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희호는 김한정에 대해 "배앓이 없이 낳은 아들"이라는 말을 주위에 자주 하고 다녔다. 이희호는 김한정의 아내 박정희도 거의 며느리처럼 대했다. 한때는 "친며느리보다 더 박정희를 아꼈다."는 말도 들릴 정도였다. 한가지 짚히는 데가 있다.

          박정희는 200112 "티타늄 다리의 천사 애덤 킹"이라는 책을 냈다. 장애 입양아인 애덤 킹 이야기는 당시 대한민국에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실상을 알면 실망하게 된다. 인권 대통령을 표방하는 김대중 정권이 꾸며낸 대표적인 ""였기 때문이다. 당시 청와대는 미국에 사는 애덤 킹 어린이를 한국으로 초대하여 잠실 야구 운동장에서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시구하게 하고, TV에 출연시키는 등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선전하는 이벤트를 했다. 이희호는 애덤 킹 가족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오찬을 베풀기도 했다. 김대중/이희호 부부의 인권과 어린이에 대한 사랑을 국제사회에 과시하기 위해 기획한 이벤트였다.

          말할필요도 없이 물밑에서 애덤 킹 초청 행사의 모든 일정을 조율한 것은 김한정이었다. 그리고, 박정희의 출판은 이를테면 이 행사의 뒷마무리 수순이었던 셈이다. 김한정 부부가 힘을 합쳐 김대중 부부를 띄워준 것이다. 주인공 애덤 킹 가족과 관객이었던 대한민국 국민들만 아무것도 모르고 장막 뒤 연출가의 장단에 감격하고 눈물을 흘린 것이다.        



[1] 월간중앙 2003. 7월호, " 청와대부속실장 김한정 DJ 보필 1,200일의 소회"

[2] 월간조선, 2003 3월호, "김대중 노벨상 국제로비 진상"

[3] 조선일보, 서울신문, 1992.10.30.

[4] 서울신문, 1992.9.29., "장기표, 이근희씨 영장 요지"

[5] 학고재, 2011.12.15., "나의 멘토 김대중" p. 29.

[6]  월간조선, 2003 3월호, "김대중 노벨상 국제로비 진상"

[7] 월간중앙 2003. 7월호, " 청와대부속실장 김한정 DJ 보필 1,200일의 소회"

[8] Ibid.

[9] 월간조선 2003. 3월호, "김대중 노벨상 국제 로비 진상"

[9]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