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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 프로젝트(연재중)/7. "자네가 역할을 해줘"

7. "자네가 역할을 해줘"

2002 4 12일 금요일 저녁. 서울 삼성동 오크우드 호텔.

여섯 명의 중년 남자가 이 호텔의 어느 객실로 모여 들었다. 참석자의 면면을 보면, 최규선 미래도시환경 대표, 김희완 서울시 정무부시장, 최성규 경찰청 특수수사과장, 송재빈 타이거풀스 사장, 이창현 (최규선의 이종 사촌형), 그리고 임철웅 (최규선의 자서전 대필 작가)이었다. 이들은 곧 있게 될 최규선의 검찰 소환에 대해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이 호텔에 모인 것이다. 벌써 세번째 모임이었지만, 무슨 뾰쪽한 대책이 나올 리 만무했다

청와대는 그에게 미국으로의 밀항을 강요하고 있었다최성규는, “내일이라도 당장 한국을 떠나자”며 최규선을 압박했다. 그러나 최규선은 “밀항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며 거절했다. 서로 옥신각신하기만 했다.

아무런 결론없이 대책회의를 마치고나니 벌써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최규선은 단골 룸살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매우 불안한 듯 폭음하기 시작했다. 그는 술자리와 화장실을 오가며 미친 듯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댔다. 어떤 통화에서는 허세를 부렸고, 어떤 통화에서는 울부짖었으며, 또 다른 통화에서는 원망의 말들을 쉴 새없이 쏟아냈다. 그가 전화를 건 상대 중에서는 신건 국정원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국정원장에게는 자신을 ‘김 이사’라고 소개했다. 미국에 있는 그의 아내에게는, “대양이를 잘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대양이는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지어준 그의 큰 아들 이름이었다.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동이 틀 무렵에서야 끝났다.

이틀 후, 2002 4 14일 일요일.

최규선은 아침 일찍 고향인 전남 영암으로 향했다. 앞서 소개한 이창현과 허필웅이 그와 동행했다. 소환을 앞두고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친지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자신이 가꾼 선산에도 들릴 요량이었다. 전남 영암군 금정면 안노리에는 지난 해 그가 거액을 들여 호화롭게 개축한 150평 규모의 선산이 있었다. 명당자리로 소문난 자리였다. 자신의 정치적 장래에 조상의 음덕을 빌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묘지 확장공사를 시작하자 일부 주민들이 반발했지만, 청화대를 들먹이고 뇌물로 달래서 겨우 공사를 끝낼 수 있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차 속에서 그는 보이스 펜 녹음기를 꺼냈다. 뭔가 비장한 각오를 한 사람처럼 보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그는 집에도 들어가지도 못한 채 호텔에 머물러 왔다. 매일 밤 만취하여 비틀거렸다. 술에 취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난 밤에도 불면증으로 근처 한국병원에 입원 했었다. 두 시간 간격으로 안정제를 맞은 후에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졌고 눈에는 핏발이 섰다. 그는 유언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마치 최후 진술을 하는 사형수처럼 격앙된 목소리로 속사포처럼 지껄이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도 김현섭 청와대 민정비서관과 통화를 했다. 그도 걱정을 많이 했다. "최규선씨 소환을 오늘쯤 해야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검찰 관계자가 묻던데, 검찰도 달리 나온 게 없어 곤혹스러운 것 같습디다. 그런데 제일 문제가 LA의 그 사람에 관한 부분을 최규선씨가 어떻게 진술하느냐를 두고 검찰뿐 아니라 청와대, 그리고 모두가 떨고 있습니다."

김현섭의 말에 나는 "1백만원짜리 수표 3백장을 건넸는데그건 수표였기 때문에 추적을 피하기 위해 정리하는데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소환을 좀 늦춰주십시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김현섭은 "아무튼 박사님, 나라를 살려주십시오. 나라를 살리셔야 됩니다. 박사님이 세우신 우리 국민의 정부 아닙니까?" 하면서 나를 달랬다.

또 그제부터 이만영 정무기획비서관과 경찰청 특수수사과장 최성규, 2명의 국정원 직원이 모여서 회의를 여러 차례 가졌다고, 최성규씨가 나에게 말해 왔습니다. "내용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출국금지가 되기 전에 최규선이가 떠나버렸어야 했는데, 출국금지가 돼서 가지도 못하고, 또 검찰에 출두하면 최규선의 말 한마디에 우리 정권이 잘못되고 대통령이 하야해야 하는데 걱정이다라고 얘기하자, 거기서 한 인사가 부산에서 밀항시켜 가지고 밖으로 보내면 어떻겠느냐는 말이 나왔다."고 했다.』[1]

그는 마치 감정의 롤러코스트에 올라탄 듯이 보였다. 녹음하는 중간에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힐 수 없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자동차 대쉬보드를 내려 치기도 했다. 그러다 절망한 듯이 간간히 회한 섞인 한숨소리를 내뱉곤 했다. 그의 이야기가 김대중 대통령을 회상하는 대목에 이르자, 갑자기 그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마치 권력의 아련한 향수를 다시 떠올리기라도 한 듯, 그의 목소리에는 한껏 힘이 들어갔다.

『저는 이 정권 탄생에 기여를 했습니다. 대통령도 97 12 20일 당선 직후에 저를 불러서, "창고가 비었네. 자네하고 나하고 나라를 살리세. 자넨 그런 재주가 있고 능력이 있네. 내가 사람 볼 줄 아는데 자넨 정치적으로 대성할 것이네"라고 말했습니다그 말 한마디에 저는 그야말로 만화 주인공인 뽀빠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DJ를 존경을 넘어 신처럼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이제 자네는 서열이 틀려져 부렀네. 권력 내 위치가 틀려져 부렸단 말일세. 이럴 때일수록 자네는 내 밑에서 커야 하네." "아이고,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대통령님."  "IMF만 극복하면 역사에 남네. 그리고 남북관계 풀어가지고 그렇게 우리 국민이 숙원하는 노벨평화상도 받을 거야. 그때도 자네가 역할을 해줘.”』[2]

그는 계속해서 지난 1998 12 IMF 경제위기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왕자와 컨텀 펀드의 조지 소로소 회장을 방한 초청해서 대우와 현대에 긴급 자금을 수혈해 준 사실을 자랑스레 늘어 놓았다. 그런 큰 일을 하고서도 이들 기업에게서 구전(커미션) 한 푼 받지 않았다고 강변하면서

녹음을 시작한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마지막으로, 그는 미국에 있는 김홍걸에게 국제전화를 시도했다. 몇 차례 신호음이 들렸지만, 연결은 되지 않았다. 그는 일방적으로 메세지를 남겼다.

"김박, 잘 들으세요. 이제 검찰의 소환이 임박해 갑니다. 김박도 잘 알다시피 내가 지난 5년을 기다리면서 정치적 재기 그 하나만을 위해 모든 걸 감내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내가 김박을 끌어안고 어떡해서든지 다 보호해 줄테니까요, 대신 아버님한테 말씀하십시오. 나를 파렴치범으로 몰려고 한다거나, 이 최규선의 재기를 막는 어떤 방법이 시도가 된다면, 나는 다 불어버립니다. 나는 죽을 각오가 돼 있어요. 이 말 명심하십시오.

김박, 꼭 말씀하셔야 합니다. 분명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땅을 치고 후회하지 마세요. 나 지금 이성을 잃었습니다. 어떤 회유도 난 안 받아들입니다. 난 내 길을 갑니다. 그대신 나는 김박이 안쓰럽고, 나도 불쌍한 놈이었고, 김박도 거기서 소외되었던 사람 아닙니까? 우리가 서로 끌어안고 위로하고 위안이 되면서 왔는데, 홍일이 형이 또 어떤 장난을 칠지 몰라요. 만약에 그런 장난이 이루어지면 공개됩니다. 모든 게 공개될 겁니다. 그러니까 빨리, 이건 아버님밖에 없습니다."』[3]

최규선, 그의 절규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이틀 후, 2002 4 16, 그는 대검찰청 입구 포토라인에 섰다. 말끔한 양복 차림으로 입고 나온 그의 손에는, “렉서스와 올리버나무”라는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마치 김홍걸에게 “너가 타는 렉서스 승용차가 내 손 안에 있다.”라는 무언의 협박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부터 언론은 연일 그의 사기행각을 대서 특필하기 시작했다. 최규선/김홍걸 게이트는 그 끝을 알수 없이 번져 나갔다.

다음 날, 2002 4 17, 최성규 총경은 자신의 사무실에 들러 최규선 관련 관련 모든 서류를 급히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는 급한대로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며칠 후에는 인도네시아, 싱가포르를 거쳐, 2002 4 20일 미국으로 도피했다. 최규선이 같이 떠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혼자라도 살기 위해 한국을 탈출한 것이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자 고문을 이유로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물론 정치적 망명이 허용될 리 없었다. 몇 달 뒤, 김대중 정권의 공식 임기가 끝난 15분 후, 그는 미 이민당국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재송환되었다. 한 때 권력에 취했던 가련한 경찰 공무원의 말로였다.

최규선/김홍걸 게이트가 세상에 알려지는 데는 한 명의 여기자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아니 마치 신데렐라처럼 나타났다고 해야 더 정확할런지 모르겠다. 그녀의 이름은 임도경, 본명은 임희경이이었다. 그녀는 1981년부터 주부생활일요신문민주일보경향신문 등 여러 잡지와 일간지를 거쳐 2002 4 15일 경 뉴스위크 취재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뉴스위크는 미국의 유명 주간지 뉴스위크의 한국어 번역판으로, 미국판의 한국어 번역 뿐아니라 국내 기사도 함께 넣어 발행하고 있었다. 주간지가 없는 중앙일보로서는 뉴스위크가 자사의 주간지 역할을 대신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미 마흔 줄에 들어섰지만 기자라는 직업으로 바쁘게 살다 보니 아직 미혼이었다그녀는 2002년 최규선 게이트가 터지면서 자신의 기자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맞는다.  뉴스위크로 옮기자마자 그해 5월부터 몇 차례에 걸쳐 최규선의 녹취록을 특종으로 보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특종으로 그녀는 기자로서 최고의 한 해 보내게 된다. 

그 녹취록은 최규선이 구속되기 전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에서 나왔다. 최규선이 자서전 집필을 위해 6, 구속 직전 협박용으로 3개를 녹음했던 것이다. 협박용 녹취록에서 최규선은 김대중의 3남 김홍걸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었다는 내용과, 청와대가 자신을 미국으로 밀항시키려는 계획 등을 자세히 털어 놓았다. 일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그 전말을 소개하는 기사를 잠깐 살펴 보자.

『뉴스위크는 최규선씨의 육성 녹음테이프(9)를 단독 입수해 2002 5 7일 처음으로 「특종: 최규선의 비파일― "DJ가 날 버렸다"」 기사를 단독 보도한 이후, 그 다음 주에도 「특종 2 : 최규선 비파일― 최규선은 DJ의 밀사였다」 (5 22일자) 기사를 연달아 보도했다.

뉴스위크가 당시 최고의 뉴스 메이커였던 최씨와 김대중 대통령-김홍걸 부자의 내밀한 관계를 생생하게 기사화할 수 있었던 것은 최씨의 자서전 대필작가 허철웅(40. 당시 시공사 단행본사업부 근무) 씨로부터 녹음테이프를 입수한 덕분이었다. 그것은 허씨가 최규선씨 자서전 집필을 위해 녹음 취재한 테이프 6(12시간 분량)와 최씨가 검찰에 출두하기 직전에 허씨와 함께 고향 선산에 내려가면서 승용차 안에서 청와대가 밀항을 권유한 사실과 김홍업씨와의 통화내용을 직접 구술 녹음한 테이프 3(1시간 분량)이다.』[4]

사실 그녀가 이러한 대특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행운이었다. 당시 그녀는 서울 평창동에 있는 영진기수련원이란 곳에 다니고 있었다. 그 곳은 빙의를 퇴치하는 데 특별한 영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어느 여 심령치료사가 운영하는 기수련원이었다. 2002년 봄, 그녀는 그 곳에서 같이 수련하는 후배인 송성희로부터 귀가 솔깃한 얘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송성희는 최규선의 전기 대필 작가 허철웅의 부인이었다.

송성희는 그에게 당시 한창 뉴스메이커였던 최규선에 대해 털어놓았다. “남편이 최규선의 자서전을 대필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기자적인 직감으로 그녀가 최고의 특종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이어지는 송성희의 설명은 그녀를 더욱 들뜨고 기쁘게 했다. “구속된 최규선이 녹음 테이프와 여러 자료를 남편에게 맡겨서 남편이 현재 그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후배 부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최규선 녹취록은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 일로 해서 그녀는 그저 그런 기자에서 단번에 대한민국의 최고의 특종 기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최규선 파일 하나로, 그녀는 그해 기자에게 주는 상이란 상은 모조리 도리하다시피 했다. 물론 그 덕택에 초고속으로 승진도 했다. 관련 기사를 보자.

『일련의 '최규선 파일' 기사는 <뉴스위크> 표지(커버스토리)에만도 무려 5번이나 등장했다. 그리고 일련의 '최규선 파일' 기사를 쓴 임도경 취재팀장(43. 현 편집장)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이달의 기자상'(한국기자협회) 2회 수상 이후, 언론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3대 언론상 중에서 삼성언론상을 제외한 관훈언론상(관훈클럽 주최)과 한국기자상(한국기자협회-한국언론재단)을 석권했으며, 그밖에도 한국언론대상(한국신문방송인클럽), '최은희 여기자상', '자랑스런 이화언론인상' 등을 휩쓸었다. 또 중앙일보사는 지난해 10월 말 임도경 기자를 <뉴스위크> 취재팀장에서 편집장으로 승진 발탁했다.』[5]

한편,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임도경 기자는 다음해에는 자신의 기자 생활에서 최악을 순간을 맞이한다. 최규선으로부터 절도죄로 고소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최규선의 사무실에 그녀와 동행했던 여인은 황 모라는 여인으로 기수련원 동료였다. 그녀들을 안내한 남자는 백태연이라는 사람으로 얼마전까지 최규선의 운전수였다. 이를테면 최규선의 허락없이 운전수의 도움을 받아 최규선의 사무실을 무단 침입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기자의 취재윤리와 언론의 취재방식이 어디까지 합법적인지 대한 헌법적 논쟁까지 불러 일으켰다. 아래 기사에서 보듯이 그 후, 그녀와 관련 당사자들은 결국 유죄를 선고 받았다.

『대법원은2006.1. 23일 최규선씨 사무실에서 '최규선 파일'을 훔친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임희경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자 최씨가 피고인에게 사무실에 보관 중인 자료를 가져갈 것을 허락한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피고인도 범행 당시 최씨의 자료를 절취하겠다는 명확한 범의와 불법영득 의사를 갖고 있었다고 인정된다"고 밝혔다.』[6]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러면, 과연 M프로젝트와 블루카펫 프로젝트는 최규선이 작성한 것인가? 3자가 작성한 문건이라면 어떤 연유로 최규선 사무실에서 발견된 것인가? 최규선은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이미 권력 핵심에서 배제되었는데, 어떻게 1999년 중반까지 이런 공작에 깊숙히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인까?

알려진 바에 의하면, 김대중 정권 초기 비서실장이던 김중권과 국정장이었던 이종찬은 최규선이 국정에 개입하는 것을 강력하게 견제했다고 한다. 특히, 이종찬은 허풍쟁이에다 사기성이 다분한  최규선에게 노벨상 공작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엄중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이영작에게도 똑같은 조치가 내려졌다. 최규선과 이영작이 더 이상 노벨상 사냥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한 것이다. 

1998년 여름, 종찬은 최규선의 빈자리에 대신 김한정을 앉혔다이렇게 하여 김대중의 전 언론 비서였던 김한정이 노벨상 사냥에 긴급 지원군으로 본격 투입된 것이다.

 


[1] 프레시안 2002.5.7., “최규선 2 녹취록 전문

[2] Ibid.

[3] Ibid.

[4] 오마이뉴스 2003.7.27., 최규선 특종 진짜 비밀을 찾다

[5] 오마이뉴스 2003.7.27., 최규선 특종 진짜 비밀을 찾다

[6] 연합뉴스, 2006.1.23., "최규선 파일 훔친 언론인 유죄 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