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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 프로젝트(연재중)/5. 블루카펫을 깔아라

5. “블루카펫을 깔아라”

2002 10 9, 16대 대통령 선거 열기가 한창 달아오르던 즈음, 주간 뉴스위크지는 도발적인 기사를 내 보냈다.

제목부터 선정적이었다. “블루카펫을 깔아라.”  봇물처럼 터져 나온 이런 저런 게이트 사건으로 이미 그로키 상태에 빠져 있던 김대중 정권에게는마치 최후의 일격같은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동안 성역으로 여겨지고 있던 김대중의 노벨상 공작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는 장면이었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노벨평화상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로비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뉴스위크 한국판은 최규선(42·미래도시환경 대표)씨의 노벨평화상 만들기 작전인 ‘블루 카펫’(Blue Carpet)과 ‘M 프로젝트’ 문건들을 단독으로 입수했다. 이 두 개의 노벨상 프로젝트는 9899년 사이 국민회의 총재 보좌역으로 일했던 최규선씨가 기획하고, 박지원 현 청와대 비서실장과 연락을 취해 실행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1]

기사의 주요 내용는 두 개의 보고서를 인용한 것이었다. 이름하여  M 프로젝트” 와 “블루카펫 프로젝트”라는 것이었다. 전자는 1998 5, 후자는 1999 2월에 각각 작성된 것이었다.  “M프로젝트의 “M”이란 메달이란 단어의 약자였고, “블루 카펫”이란 것은 노벨평화상 수상식장에 깔리는 푸른색 카펫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 두 개의 보고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해 누가, 언제, 어떻게, 이 프로젝트를 실행했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1998 5월에 최종 작성된 ‘M 프로젝트’는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위해 해외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완성되었다. 이 계획은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노벨상 수상을 위해 구상된 초기의 많은 계획서 중의 하나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이후에 기획되어 보다 구체적으로 추진된 계획의 서막에 불과한 것이기도 했다. 작성자가 누구인지 밝혀진 바 없지만, 내용은 상당한 구체성을 띄고 있었다.

우선, 문서에 의하면,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DJ 노벨상 팀은 노벨평화상 수상자 또는 국제 저명인사를 앞세워 자발적·자생적 성격의 범세계적인 추대 조직을 운영하고, 국내에서는 소수 정예의 믿을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중심으로 비공식 비공개 비선조직’으로 구성하기로 되어 있었다. 특히, 미국의 스칼라피노 교수,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 등 김 대통령의 해외인맥을 전면에 내세워 활용하고, 해외 현지의 교포 조직이 지원 조직으로 참여하도록 했다.

이 프로젝트를 구상한 팀은 김대중의 수상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업적과 명분을 만들 필요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김 대통령의 민주화 및 인권투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민주 지도자 이미지를 만들고, 북한 기아 어린이 돕기 등 인도적 지원을 확대해 인도주의자의 이미지를 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다른 나라의 민주화 및 민권투쟁을 지원해 국제적인 리더쉽을 보이며, 특히 미얀마와 인도네시아 등 세계 각국의 민주화 및 민권투쟁을 지원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들은 또한 노벨평화상 5인 위원회, 스웨덴 한림원 및 노르웨이 국회를 주 공략 대상으로 삼아 재계의 해외 인프라 및 인맥과 인적자원을 활용하여 이들에게 로비하는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특히 5인 위원회의 개인 신상을 조사하고, 현지 한국인 지인을 파악하며, 맨투맨식 접근을 통해 “5인에 대해 1인당 최소 3명이 마크한다”는 세부 지침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기사는 최규선 씨가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해 그동안 어떤 활동들을 해 왔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활동은 유엔인권상을 수상하는 것과, 마이클 잭슨을 방한 초청하여 비무장 지대에서 평화의 콘서트를 여는 계획이었다.

문서에 의하면, 최규선은 98 4 9일 계약대행사인 골드윈사를 통해 칼리드 압둘라 타리그 알만소르라는 사람과 컨설팅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노벨평화상 프로젝트 추진했다. 알만소르는 하버드 법대의 교수를 지낸 국제 변호사 출신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왕자의 수석변호사로, 아프리카 20여개 국가에서 진행되는 왈리드 왕자의 사업을 총괄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가나 출신으로 같은 국가 출신인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최씨는 그날, ‘유엔인권상 수상 및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 면담’ 보고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당시 루트는 박지원 청와대 공보수석이었다. 그는 이 보고서에 알만소르 박사와의 컨설팅 진행과정을 상세히 기록했다. 보고서의 핵심은 “알만소르 박사가 아난 총장과 가까운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알만소르 박사가 4 15일 뉴욕에서 아난 총장을 만나 김 대통령의 유엔인권상 수상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보고서는 “면담 결과는 추후 다시 보고하겠다”며 마무리 짓고 있었다

알만소르 박사는 컨설팅 계약 후 세부계획을 세워 4 20일 최씨에게 전달했는데, 우선 김 대통령이 방미하는 길에 적어도 34개의 세계적인 인권상을 받도록 조언하였다. 그는 유엔·하버드대·UCLA· 남가주대학에서 수여하는 상을 바람직한 것으로 꼽았다. 최규선은98 4 15일 뉴욕에서 코피 아난을 만나 김대중의 유엔 인권상 수상을 논의했다. 또 유엔이 김 대통령에게 가장 부각되는 인권상을 수상할 수 있도록 권유한다”고 했다.

아난 총장은 접촉창구로 에티오피아의 유엔 종신대사인 두리 모하메드를 지명했다. 모하메드는 알만소르 박사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당신이 준 김 대통령의 개인 프로필은 이미 아난 총장에게 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유엔인권상 수상과 관련해서는 “대통령이 오는 날짜에 맞춰 유엔인권위원회가 적절히 일을 진행시킬 수 있도록 하겠다.”며 “다음 주에 아난 총장을 만나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그해 6 7일 뉴욕에 도착하여 숙소인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유엔 국제인권연맹이 주는 올해의 유엔인권상을 수상했다. 김 대통령은 그 길로 유엔에 들러 아난 총장을 만나, “인도와 파키스탄간 핵실험 경쟁이 중단돼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면서, 국제적인 정치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아난 총장의 방한을 제의했다.

아난 총장은 그해 10 22일 서울을 방문해 ‘서울평화상’을 받고 청와대로 김 대통령을 예방해 유엔안보리의 개편문제, 한반도 주변정세 등 상호관심사에 관해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아난총장은 경희대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도 받고 돌아갔다이렇게 김대중과 코피 아난은 서로 유엔인권상과 서울평화상을 맞교환하고, 2000 2001년에는 각각 노벨평화상도 나란히 타는, 그야말로 “사이 좋은” 관계가 됐다.

최규선은 98 1 DMZ 공연의 계획안을 작성했다. 그 행사의 목적은, “넬슨 만델라, 하벨 전 체코 대통령, 지미 카터,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들 등 영향력 있는 세계의 유명 지도자들과, 팝·클래식·스포츠 각 분야의 세계적인 스타들을 적극적으로 끌여들여, 이들에게 한국의 현실을 인식시키고 우호적인 협조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김 대통령의 외교력 배가는 물론 새정부의 통상 외교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이 행사는 “전 세계에 마지막으로 남은 분단국가라는 현실을 극복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써, 한반도에 영원한 종전을 선언하는 뜻깊은 행사가 될 것이며, 수익금은 북한은 물론 전쟁과 기근에 시달리는 제3세계 어린이들에게 식량 및 구호물품으로 제공할 예정”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번 행사에 명예 공동의장으로 활동하게 하며 북한의 참여를 유도하고 김 대통령에게 남아공 최고의 인권상인 굿 호프(Good Hope)상을 수여하게 한다”고도 했다

본격적인 노벨평화상 추진계획인 ‘프로젝트-블루 카펫’은 99년초에 발동이 걸린다. 최규선은 ‘블루 카펫’ 프로젝트 및 그간의 프로젝트 관련 활동 보고서를 99 2 24일 청와대에 제출했다. “‘블루카펫’이란 노벨상 시상식 무대에 깔려 있는 융단을 상징하며, 그 말이 전해주는 이미지 그대로 ‘희망의 길’을 상징한다”고 최씨는 프로젝트 기안서 첫 페이지에서 설명했다

문서에 적힌 추진 목표가 M프로젝트와 동일한 것으로 보면, ‘프로젝트-블루 카펫’은 M프로젝트의 발전적인 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당위성 및 효과를 설명하는 부분 중 한 항목에는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가는 과정 곳곳에서 남북정상회담, 이산가족상봉, 북한어린이 돕기 등 다양한 ‘감동의 장면’을 만들어 나간다.”는 점이 강조돼 있었다.

블루 카펫의 추진전략으로는 “북한과의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만델라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추천인으로 활용한다는 것”등이 활동내용이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었다. 노벨평화상으로 가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김 대통령으로 하여금 세계적인 인권상을 받게 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다. 최씨는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과 여전히 핫라인을 구축하고 있었던 듯 편지에 나타나 있다. 이들의 다음 목표는 루스벨트 4대 자유상(Four Freedoms Award)이었다. 이 상을 추진한 과정을 알 수 있는 문건의 내용도 소개되었다.

첫번째 서류는 윌리엄 휴블 루스벨트 재단 이사장이 99 3 25일 김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이었다. 그 편지는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차오치 추(Chao-Chi Chu) 이사에 의해 귀하가 2000년 수상식에서 시상하게 될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4대 자유상 수상자 후보로 추천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고 되어 있었다. 차오치 추는 최씨가 버클리대 스칼라피노 교수로부터 추천받은 중국계 실업가로서, 루스벨트 재단의 이사였다. 몇 장의 팩스 문서들은 “최씨가 차오치 추를 통해 휴블 이사장을 움직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휴블 이사장은 편지 말미에 “제가 이 서신을 드리는 것은 저 개인적으로 귀하의 지명을 지지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도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귀하의 뛰어난 업적을 깊이 존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며 지지의사를 밝혔다.  

두번째 서류는 최씨가 이 편지 사본과 함께 박 실장(당시 공보수석)앞으로 보낸 4 2일자 팩스문서다. 편지 내용은 “루스벨트 재단 휴블 이사장이 대통령님께 올리는 편지를 저에게 보내와 수석님께 전합니다.”로 시작되고 있는데, “휴블 이사장이 대통령을 적극 지지하고 있으나 재단 내에는 한국인 이사가 없다.”는 점도 설명되어 있다.  

이 편지를 받은 박실장은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최씨는 차오치 추에게 팩스문서를 보내 “박수석이 ‘원본 편지’를 요청했다.”며 “원본을 청와대로 보내달라.”는 요청서를 띄웠다. 최씨는 대통령이 자신의 공을 잘 알아 주기를 원한 듯, 자신의 명의로 보내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차오치 추는 그의 부탁대로 원본 서류를 최씨가 미국에서 ‘청와대 박지원 공보수석앞’으로 보내는 것으로 만들어 4 9일 국제 특송 우편으로 전달했다. 최씨는 차오치 추가 그날 바로 그에게 보낸 영수증 사본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이후 진행사항은 또 다른 한 통의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최씨가 송영오 이탈리아 대사(당시 그는 외교통상부 본부대기중인 이사관이었다)에게 홍순영 외교통상부장관을 ‘비공식적’으로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한 편지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올해 초 스칼라피노 교수님의 제자를 미국에서 만났습니다. 이 제자는 Mr. Chu라는 사람으로 루스벨트 재단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중국계 미국인 사업가입니다. 그와 함께 2000년 루스벨트 자유상을 저희 대통령이 수상하도록 노력해왔습니다. 저는 당시 박지원 공보수석과 함께 이 일을 추진했으며, 박 수석이 대통령께 보고해 왔습니다.

금번 루스벨트 재단 이사장과 전화통화 중 저희가 수상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말을 듣고 현 박지원 장관이 대통령에게 재차 보고한 결과, 홍순영 외통부 장관이 책임지고 추진하라는 말씀이 계셨답니다. 박장관이 관계서류를 홍 장관께 넘기셨답니다. 대사님께 부탁드릴 점은 이 문제로 제가 홍 장관님을 한 번 뵙고 싶으니 비공식적으로 주선을 부탁합니다. 참고로 재단에서 보내온 서류를 여기에 첨부합니다. 』[2]

이 편지로 보면 이 프로젝트의 추진과정에 현직 장관들까지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중에 날짜가 기입돼 있지 않았지만 이 편지에서 박실장을 ‘박장관’으로 호칭한 것으로 보면, 99 6월 이후인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 대통령은 루스벨트 4대 자유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정확히 나타나 있지 못하다. 최씨의 문서들을 통해 당시 정권의 움직임을 짐작해보면, 이런 과정에서도 또 다른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을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최씨는 99 2월 노르웨이를 방문해 게이르 룬데스타트 교수를 만났다. 룬데스타트 교수는 노르웨이 노벨평화상위원회 사무총장이었다. 최씨는 룬데스타트 교수에게 보낸 2 22일자 편지에서, “귀국후 김 대통령에게 보고할 것”이라고 썼다. 『“며칠 안에 김 대통령을 잠시 만날 것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지난번 오슬로에서 만난 일을 말씀드리면서, “교수님이 83년에 하버드대에서 김 대통령을 만난 일이 있다.”는 말씀을 전하겠다. 대통령께서도 기억하실 것이다.”』

최씨가 룬데스타트 교수와 주고받은 팩스문서를 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99년 초에 시작된어 그해 9월 이후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최씨는 2 11일 노르웨이로 가서 그를 만났고, 이를 계기로 “99 910월께 금강산 관광에 초청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룬데스타트 교수는 일정이 모두 차 있다는 것을 이유로 이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동아일보에 의하면, 뉴스위크가 이 기사를 내보내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던 모양이다. 아래 기사는 그 정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뉴스위크 한국판’ 측이 당초 표지에 박 실장의 사진과 이름을 넣었다가 인쇄가 진행중인 상태에서 뒤늦게 이를 삭제하고다시 표지를 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박 실장이 기사내용을 사전에 알고 수정을 요청한 때문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 주간지측은 “기사내용에 문제가 있어 자체판단으로 표지를 바꿨다”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소동으로 인해 이 주간지는 평소보다 하루 늦게 발행됐다. 뉴스위크 한국판을 인쇄하고 있는 ‘고려 피엔텍’ 측은 주간지 측의 요청으로 9000부를 폐기했다고 밝혔다.』[3]

이쯤에서 이 예사롭지 않은 기사가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됐는지, 그 과정을 한번쯤되집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1] 뉴스위크,2002.10.16., “노벨상 수상을 위해 블루카펫 깔아라

[2] Ibid.

[3] 동아일보, 2002.10.9., "노벨상위 집중 로비"